0.
아무도 가닿아 보지 못한 섬으로 노를 젓는 일이란 목적적인 것일까? 섬의 실체는 안개로 가려져 있다. 누군가가 잰 체하며 이렇다 저렇다 대중잡아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일이다. 인생의 과정이 바로 그렇다. 현실이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여러 모양의 족쇄들을 매단 채,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지겨운 모든 것들의 끝을 갈망하면서 하염없이 노를 젓는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번쩍 일어서서, 뭐 대단한 것이라도 깨달은 것처럼, “아! 노를 젓기 때문에 괴로운 거야!” 하고 일갈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부처다. 그 옆에서는 너 힘든 것을 내가 아니 너는 이제 힘들어하지 않아도 된다 사근사근 말하는 이가 있다. 그의 이름은 예수다. 자유가 그토록 어려웠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을 쌓는 게 자유에 가까워지는 일일 테고 마르크스는 단결하여 일어서라고 말했다. 한 그리스 청년에게는, 순례를 해보기도 하고 지식자들의 사회를 꿈꿔보기도 했으며 노동자에게는 공산주의가 낫다고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그 자신이 책벌레로만 느껴진다. 그는 얼마 전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친구를 떠나보내면서 들었던 책벌레라는 소리를 되뇌이던 참이다. 일어서서 행동할 힘도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조소할 용기도 없는 그는 방조자다. 최소한 행동하는 이가 방조자보다는 한 발자국 더 자유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 먼 섬의 광산으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 .’ 그러던 참에 문득 누군가가 거침없는 한 마디를 건넨다.
“날 데려가주시오. 나는 수프를 만들 줄 아는 요리사이자, 꽤 괜찮은 광부이며, 산투르에도 일가견이 있다오.”
<그리스인 조르바>다.
1.
줄거리의 구성은 단순하다.‘나’는 60대 노인,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떠나 갈탄 광산에서 인부를 부리게 된다. 그러면서 크레타 섬에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겪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조르바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나’는 조르바와 여정을 같이 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비범함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나’는 이성과 합리로 세상을 판단하는 지식인이다.‘나’에게는 민족이 있고, 조국이 있으며, 그 모든 것에서 옳고그름을 판단하게 해주는 잣대가 있다. 그 잣대는 바야흐로 수없는 책으로써 형성되어가는 중인데, 최근 2년에는 니체에게 영감을 받아 부처를 광맥처럼 파들어가고 있다.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나’를 옭매고 아마도 다른 사람 역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시대의 족쇄에서 부처를 ‘최후의 인간’으로 점지하고 어떤 잣대가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조르바는 단박에 그를 비웃는다. “자유?”그는 크레타 섬이 독립을 투쟁하게 된 역사를 실제로 살아낸 증인이다. 그것이 자유라면,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유를 원한다면 살인을 저지르고 사기를 쳐야 한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정말이지 내가 죽이고 사기 친 이야기를 다 한다면 머리끝이 쭈뼛거릴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형편없이 굴었는데도 자유가 오다니! 하나님이 벼락을 내리는 대신에 자유를 주시다니! 나는 이해가 안 됩니다.>
‘나’가 담론 속에서 헤메었던 자유를 조르바는 단박에 정리해낼 수 있다. 크레타 섬이 독립했던 그 순간, 금화를 위해 수없이 민간인을 약탈했던 조르바 바로 옆의 그 양아치는 터키 놈들에게서 빼앗은 금화를 허공에 하염없이 흩뿌렸다.
“아시겠소? 그런 게 자유라는 겁니다.”
2.
합리의 산실은 경험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경험이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작중에는 세 가지 인간 군상이 드러난다. ‘나’, 대중, 조르바.
대중이 지표를 왜곡시킨다면, ‘나’는 함의에 매진하고, 조르바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오르탕스 부인은 프랑스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경멸 어린 몇 마디의 대상이 되고, 종교에 헌신하는 수도사들은 산속 수도원에서 대구와 신문 같은 속세를 신상처럼 갈망한다. 과부는?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외부인으로 배척당해 마을의 노인에게 죽는다. 그의 손자가 실연으로 자살했기 때문이다. 자하리아 수도사의 돌연사는 성모 마리아의 축복이라.
여러 순간이 있지만 조르바와 ‘나’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순간 중 제일은 과부의 죽음이다. ‘나’는 과부에게 실연당해 죽은 손자 때문에 흉흉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일 뿐 운명을 과부 탓으로 돌리지 말라며 몇 마디한다. 그 자신도 믿지 않는 운명을 하나님에게 돌린 탓에 부끄러워하던 ‘나’는 그 말을 계기로 과부에게 호감을 사고, 정사를 하게 된다.
과부는 죽는다. 교회를 드나드는 과부를 죽이려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조르바가 주먹을 휘둘렀다면 ‘나’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죽음을 뒤로 하고 걸어오던 ‘나’는 이내 그 과부의 죽음을 역사적으로 몇 번이나 있어 왔던 여타의 사건과 같은 성질로 합리화하는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다.
이제 ‘나’가 여즉 슬퍼하는 조르바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마디를 꺼내려 한다. 그러자 조르바가 목메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답하길,
“닥치쇼!”
‘나’는 부끄럽다.
3.
조르바는 자신의 육체가 자아내는 감정에 솔직하다. 따라서 그의 영혼 역시 자유롭다. 이 한량에게도 가끔씩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전 자유 같은 건 원치 않는데요.” 롤랑이라던가 하는 여급이 수천 드라크마를 쾌척하는 조르바 앞에 매달려서 당돌하게 꺼낸 말이다.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니, 그럼 이 여급도 인간인가? 조르바는 생각한다.
돌아온 조르바에게 ‘나’는 묻는다. 그래서 그 고민은 해결되었소?
“아, 그럼요.”
그 지갑이 부풀어 있는 순간에는 자유도 던지고 돈의 노예가 되고 싶은 것이다. 해답은 명쾌했다. 사람이 다 그렇다. 누구나 무언가의 노예가 되고 싶어한다.
결국 조르바와 ‘나’가 동의하는 한 가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자유라고 착각하는 상태는 묶여 있는 노예의 사슬이 길 뿐, 우리는 좀더 넓은 경기장에서 재미를 보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자유다.
조국은 착각하기 쉬운 긴 사슬의 하나다.
<내 조국이라고 했습니까? 보스는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같은 것들을 다 믿습니까? 당신이 믿어야 할 게 있다면 나 같은 놈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입니다. 그것도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짐승 신세를 못 벗어나는 거예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걸 끝냈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조르바는 인간을 터키 놈, 불가리아 놈, 그리스 놈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이미 해보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 놈이란 이유로, 터키 놈이란 이유로 마을에 불을 지르고 강간을 해보기도 했다. 이제 조르바는 사람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르러서는 그것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입에 쑤셔 넣을 빵에다 두고 맹세합니다만,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그다지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모두 불쌍하거든요.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이 불쌍한 것! 이런 생각이 들어요. 누군지는 몰라도 이 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겠지. 이 사람 안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죽어서 땅 밑에 누울 테고, 구더기 밥이 될 테지. 불쌍한 것! 우리 모두 한 형제나 다름없습니다. 모두가 구더기 밥이 되거든요.>
조르바는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인물이다. 신앙은 애초 그의 인생에 없던 것으로 조르바는 신을 마음껏 비꼰다. 그것은 실존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었다기보다 차라리 이 세상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무슨 상관이랴 하는 관찰에 바탕을 둔다. 어떤 쓸모가 있기에 인간이 이 세상에 왔는가?
조르바 생각에 인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다. 모든 것이 다 똑같다. 마누라가 있건 없건, 정직하건 아니건, 높은 사람이건 천박한 사람이건 다 마찬가지이다. 오직 살았느냐 죽었느냐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르바가 두려운 것은 늙는다는 일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훅! 하고 꺼져버리는 촛불일 뿐이라고, 늙는 것은 그의 도전을 어렵게 하는 치욕일 따름이지 죽음에 가깝다는 데에 어떤 의미도 수행하지 못한다.
4.
살다 보면 삶에서 동떨어진 여러 질문들이 생겨난다. 우리 존재가 대지에 뿌리에 붙박여 살아가고 있기에 공상은 하늘을 떠돈다. 그 공상에 현실의 무게가 옮겨가기 시작하면 우리는 삶을 돌아보면서 해방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 해방이 누군가에 따르면 일차원적이기도, 보다 고차원적이기도 하다. ‘나’에 따르면 주어진 인생을 먹고 마시고 연애하고 돈 벌고 명성을 쌓는 걸 해방으로 여기는 이가 있고, 인류의 삶을 제 삶처럼 여기면서 인간을 사랑하고 선행하고자 하는 이가 있고, 전 우주의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과 짐승, 나무와 별이 그저 물질을 정신으로 바꿔야 하는 지독한 투쟁의 일원으로 한 가지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
그 담론이 춤으로 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르바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리는 나쁜 놈이든 좋은 놈이든 속에는 하나님과 악마가 있어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 만일 저 위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악마랑 구별 못할 종자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나가 사람이라면 자유롭고 싶어 할 것이다. 니체는 도덕적 명령에 순종하는 낙타도, 자유의지를 품고 부정의 의지를 포효하는 사자도 아니며 삶을 순수하게 긍정하며 그저 즐겁게 뛰어 노는 아이가 진실로 옳다고 말했다.
니체까지 꺼내들지 않더라도 조르바에 가까운 삶 정도면 비로소 옳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방은 신에게도 내면의 목소리에도 있지 않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붙박여 있는 족쇄는 스스로의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원해서 붙이고 있을 뿐. 던지려면 언제든지 던질 수 있다.
견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붙이고 싶어서 붙이고 있는 것이라면 해방은 실존의 상태다. 조르바는 실존해 있다. 지문 속의 조르바가 하는 말에 생기를 부여하기 위해 꾸미는 꽃 몇 송이처럼 비유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을 현실로 끄집어내어 조각하고 조르바와 똑닮은 모습으로 만들어냈을 때, 조각은 조각사를 차내고서 집어 치우라고 말할 것이다. 스스로의 인생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을 때, 자신의 몸을 자신이 깎아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실존한다. 그 여정에서 별 대단한 지침은 필요 없다. 굳이 조르바를 따르자면 인간은 무엇이든 너나 할 것 없는 짐승이며,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든 내 옆에 미운 이든 그 속에서 하나님과 악마의 싸움을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불쌍한 존재라는 인식 정도가 나침반이 될 따름이다. 신은 지침이 될 수 없다.
5.
오르탕스 부인이 죽고 케이블을 설치하여 한몫 당기려던 광산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나'는 조르바를 따라서 춤을 춘다. 언제나 방조자였던‘나’가 조르바의 지침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조르바와 헤어지고 자신이 속한 세계로 돌아온 '나'는, 조르바의 실존적이고 원시적인 세상으로 다시 발을 떼기 어려워한다. 조르바의 마지막 연락은 ‘나’가 독일 대공황의 한복판에 있던 당시 전보였다.
"멋진 녹옥 찾음. 즉시 오길 바람. 조르바.“
육체와 정신을 온전하게 해줄 빵 한 덩어리가 없어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고작 녹옥 한 덩어리를 보러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 오라니! '나'는 되뇌인다. 아름다움은 지옥에나 가라지.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고통을 모른다니까.
생각컨대 아름다운 보석과 인간의 고통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나’의 속에선 노여웠던 생각이 슬며시 사라지고, 조르바의 초대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끝내 ‘나’는 자기 안에 있는 원시의 목소리에 대답하길 거부한다.
조르바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목소리에 투철하다. 전해들은 바, 그는 임종 막바지 모두를 거칠게 밀어붙이고 창문가로 가 창틀을 부여잡는다.
조르바에게 세상은 언제나 신비롭다. 상식의 렌즈를 내다 버리고 본연의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 아름다운 파도는 어제의 것과 오늘의 것이 다르다. 언덕을 지나는 노새에 이르면, 어찌나 저렇게 놀라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창밖을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는 말처럼 울기를 반복한다. 자신을 가둔 병실 너머로 그가 세상에 던지고 싶은 흔적은 과거를 돌이키는 정리 따위가 아니라, 창문 바깥 풍경에 대한 외경이 전부였다. 이보다 삶에 솔직할 수가 있을까.
거짓말이 좋다 나쁘다 하는 가타부타를 넘어 삶의 솔직함이란 구도자가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는 행인 모두가 지녀야 할 자세다. 삶은 여러 번 주어지지 않고, 소중한 것에는 솔직해야 하는 법이다.
6.
조르바의 일생을 듣는 ‘나’의 변화와 조르바의 최후는 독자에게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민족, 인류, 신, 소중할 법한 모든 것은 나중의 일이다. 당신은 지금 가장 중요한 자신에게 솔직하게 대면하고 있는가? 보다 정확하게, 당신은 실존해 있는가?
책으로 자아낸 말 몇 마디에는 피 한 방울도 맺혀 있지 않기에 ‘나’는 책을 던지고 춤을 추기로 결정한다. 민족주의자 친구는 그 최후까지 현장에 투신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민족의 가치에 헌신했다.
조르바를 읽고서 외면해왔던 마음 어딘가의 멍울이 직시되지 않는다면 필시 그 독자는 ‘나’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이다. 대열 끝자리에서 모든 인간의 해탈을 기다리고 있는 그 자가 당신이 아니라면, 독자는 분명히 그 긴 사슬 어딘가에 묶여서 자신을 착각하고 있다.
책벌레였다가 춤꾼이 된 어느 조르바의 제자에 따르면, 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초라한 둘레에 스스로 믿는 장벽을 쌓는다. 그러나 하찮은 확신의 울타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거리다 보면 아무런 도전도 받을 수 없다. 미래는 어딘가에 숨어 있지도 온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조르바와 함께 현재를 살아야 할 시간이 왔다.
‘멋진 녹옥 찾음. 즉시 오길 바람. 조르바.’
*
독서감상문 주제로 냈던 거지만.. 쩝..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