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 good 한강 - 몽고반점 독서

 때때로 멈출 수 없는 충동이 꿈틀거리는 것을 선연하게 자각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내면의 억제에 대한 반작용일 때도 있고, 혹은 내심 의식해온 금기의 역사와 같은 맥락에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충동을 유용하게 활용해낸 누군가가 부처 따위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일인지도 모른다. 깨달음을 범인과 철저히 유리시키는 종교의 지식인 구원론은 시대를 거쳐 민중에 가깝게 진화했지만, 미처 놓지 못하는 금기에 대한 단호함은 이 같은 역발상을 꺼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질同質의 여부를 차치하고서, 법열 같은 감흥의 순간은 분명히 일상에 상존해있다. 단지 무의식중에 알았거나, 일부러 모른 체할 뿐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것은 이드가 자아에 의해 초자아와 중개되기 이전 시원始原을 향해 맥박하는 태동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움직임은 그 충동이 터부Taboo의 경계를 넘어가려는 듯 오묘한 발악을 보일 때이다. 아담과 이브가 참을 수 없는 선악과에 대한 충동으로 원죄를 부여받았듯, 우리는 분명히 금기를 넘을 때 대가에 상응하는 쾌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한강의 ‘몽고반점’은 그와 같은 충동이 현실에서 어떤 구체성으로 인간을 섭렵하는지, 문학적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문장을 열거해낸다.

 예술가인 중년 사내는 육칠 세 남짓한 아이를 둔 아빠이자 옷가게를 하는 아이의 남편이다. 그러나 최근 그에게 가장 의미를 갖는 존재 방식은 ‘형부’이다. 처음부터 그의 안에 처제에 대한 욕망이 자리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가 별 생각없이 꺼내들었던 몽고반점의 담화는 예전 사건들로 퇴적되어 있던 처제의 인상을 파각破却하는 동시에 강화시켰고, 이후 줄곧 처제의 몽고반점은 그의 안에서 커져가기만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망설이던 끝에 처제에게 자신의 예술에 나체로 출연해줄 것을 제의한다. 그리고 종착점을 모르는 기차처럼 몽고반점에 대한 욕망으로 말미암아 그는 처제에게 계속 밀접해간다.

 눈여겨 볼 것은 소설 중에 아내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 역시 ‘그’로만 등장할 뿐, 3인칭의 장점을 빌려 처제의 시각에서 등장하지도 않는다. 처제는 마지막까지 영해가 아니라 ‘그녀’이다.

 처제는 과거 자살 소동을 벌여 폐쇄병동에 수감되는 등의 사건을 벌인 전적이 있다. 주인공은 짐짓 그러한 비정상을 배려하는 듯하지만, 다시 그는 동서에 대해 일상과 감각에 천착하는 동서가 처제와 얽힐 것을 생각하면서 모욕감을 느낀다. 처제에 대한 그의 인상은 소설의 문장을 빌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담담한 눈동자 뒤로 강렬한 욕망을 억누르는, 일견 알지 못할 구석이 있는 여성이다. 처제는 그에게 철저하게 타자화되어 있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결말보다는 오히려, 정사를 치르고 난 후 몽고반점의 문답 다음에 오는 둘의 대화라고 하겠다. 뱃속 얼굴은 그녀가 채식을 하는 이유이자 형부와의 섹스처럼 비일상적인 일을 매개하는 근본 요인이기도 하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암시는 분명하다; 일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처제의 인상 뒤에는 뚜렷한 트라우마가 이유로 자리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몽고반점 이외에 그녀와의 대화에서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 방식이 처제와의 사랑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형부’였다는 사실 역시 뚜렷해진다. 소설은 경계를 뛰어넘는 사랑의 순애성을 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금기에 대한 욕망과 격렬하게 투쟁하는 그의 내면을, 그리고 그 금기의 어김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릴 뿐이다. 이 소설에서의 사랑은, 성性은 다시 말하자면 그로테스크의 성 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금기는 반대로 대상이 자리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올바름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한다. 그에게 처제는 몽고반점으로 상징되는 금기와 쾌락의 대상일 따름이다.

 언뜻 몽고반점은 처제를 예술과 결부짓는 그의 연출로 말미암아 유미주의적 의식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섹스를 위해 꽃을 그리러 달려가는 순간 예술의 핑계는 사라지고 만다. 몽고반점의 대척점은 너무나 분명하게 ‘5월의 신부’라고 불릴 정도로 엄격했던 그의 예술 방식이자 삶의 방식이며, 따라서 몽고반점은 처제의 욕망에 대한 표상적 이유일 뿐 그의 안에서 재발굴된 것이다.

 핑계가 사라지자 그는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하고 자문자답한다. 죽어, 라고 되뇌이면 언뜻 속내가 편해지는 것도 같다. 그러나 마지막, 죽음의 결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순간 그는 막상 죽지 못한다. 그런 그의 망막에는 처제의 타오르는 꽃처럼 강렬한 육체가 붙박여 있을 뿐이다. 더없이 생득적인 욕구를 파고드는 금기는 죽음을 핑계로 삼을 뿐 그와 죽음의 거리를 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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