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쓴 리뷰를 옮겨오는 거라 존대가 없습니다)
재미있었다!
사실 김재한이 쓰는 글은 대개가 어느 정도는 재밌다. 장르소설이 완전한 환상 세계를 독자 앞에 드러내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 중에서도 한국 장르소설이 검기니 뭐니 하는 설정으로 떡칠하고 회귀 따위로 개연성을 성립시키는 영웅담의 전형이라면, 김재한의 소설은 한국 장르소설 중에서도 가장 양판소스럽게 재밌지 않나 싶다.
특히 그의 설정력은 어딘가 남자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한 소년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는데, 특징으로는 약간 중2병스럽도록 짜인 설정(작게는 무공에서부터 크게는 신까지 닿는)과 다른 하나로는 그런 설정들을 활용하는 전투씬의 묘사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화려하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설정들을 이용해서 주인공이 그 세계관 내에서 힘을 키워 무쌍을 찍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감각으로는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워메이지 전작까진 안 봐서 모르겠고, 아 하난 본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워메이지부터 이어지는 폭염의 용제, 용마검전, 마검전생, 성운을 먹는 자까지는 계속 그래왔다.
그 중에서도 성운을 먹는 자가 제일 재밌는 것 같다.
개요는 이렇다.
50년에 한번 성운의 기재라 불리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의 힘을 받은 절세의 기재들이 세상에 나타난다. 이들의 재능이 너무나도 뛰어나기에 언제나 세상이 그들에 의해 요동치고는 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성운의 기재가 태어나는 시기, 그들을 원하는 집단에 의해 핍박받은 객점의 심부름꾼 소년 형운은 기인 귀혁을 만나 제자가 된다. 성운의 기재와 같은 날에 태어났음에도 아무런 재능도 갖지 못한 형운에게 그는 성운의 기재를 능가할 한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는데, 그 방법이란… (출간책 소개에서 빌려옴)
31권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너무 긴 바람에 나온 데까지 읽고 한참 후에 까먹어서 또 처음부터 정주행하고, 이런 식으로 세 번이나 읽게 되는 바람에 이번 삼회차 때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그래도 재밌다는 게 참 뜻밖이었다.
성운을 먹는 자가 특히 재미있는 이유는 이번에 보여준 세계관이 가장 완결성이 높으면서도 흥미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인 것 같다.
서양 중세 판타지도 아니고 그보다는 무협에 가까운데, 무협이라기에는 동양 판타지에 가깝다.
작가가 묘사를 통해 집중해 보여줄 수 있는 소설 내 세계관은 한정돼 있기 마련이지만, 31권이나 되는 긴 분량 안에서 윤극성, 설산, 중원삼국, 청해군도 등의 모습은 충분히 뚜렷하게 남는다. 작가가 굳이 그 세계관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음에도 주인공의 행보에 따라 닿는 지점들이 스토리상 분명한 의미를 갖으면서, 성먹자 세계의 모습이 독자에게도 와닿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게 이번 소설을 가장 재밌다고 느낀 점 아닌가 싶다.
단순히 주인공의 행보로만 보면 비슷할지언정 내게는 이번 독특한 동양 판타지 세계관의 흥미도와 그 안에서 어우러지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전작 대비 더 큰 재미를 안겨주었다. 아마 이런 세계관, 이런 스케일과 그 안에서 발발 싸돌아다니는 주인공이 아니었으면 재미를 느끼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에도 설정 말고 등장인물들을 잘 못 살리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그 재주가 돋보였다.
한서우나 귀혁, 광요, 백야 등 주인공 못지 않은 배경 스토리를 가진 인물도 많았다. 이 역시 재미에 큰 공헌을 했다. 만약 이런 사이드 스토리, 예컨대 성하와 백야의 만남 따위를 뺐다면 31권까지 가지 않았겠지만 그만큼 재미도 줄었을 것이다. 작품에 깊이를 주었다기에는 근본부터 철저한 장르소설이라서 좀 그렇고, 읽는 재미를 훨씬 곱해주었다고 하면 좋겠다. 중간에 눈물을 짤 뻔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또다른 하나는 작품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뭐라 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김재한 특유의 설덕력을 너무 뽐냈으면 좀 중2병 냄새가 강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내가 또 읽었을 거라서.
아무튼 괜히 쓸데없는 잡설정을 잔뜩 넣었다면 너무 중2병 냄새가 강해졌을 텐데 동양 판타지 세계관 안에서만 철저히 그 상상력을 제한함으로서 완성도를 높였다는 생각이 든다.
김재한 글의 주요한 특징 중 또 다른 건 항상 세계를 결정지을 거대한 운명의 싸움으로 날아가 버린다는 건데, 전에는 갑자기 초인계에서 슈퍼계로 날아가서 멍해진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결전의 장까지도 끝까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었다. 애초에 작품의 결말을 제목에서부터 정해놓고 들어가서 전에는 쓰다가 날아갔다면 이번엔 맥락 안에서 잘 마무리 짓지 않았나 싶다.
전작으로 말하자면 폭염의 용제에서 드워프와 걔네 기술력에서부터 상당한 중2병 냄새를 느꼈고 마지막의 우주 차원 싸움에서는 대략 정신이 멍해졌었던 기억이 난다. 워메이지에서도 역시 그 기억 안 나지만 사멸한 요정족도 뭔가 왠지 엄청 뜬금없는 스토리의 빌런이라는 느낌이었다. 대단한 것처럼 나오던 천상계 능력자들도 걍 쩌리되고. 뭐 다 재밌게 봤지만~
그래도 한 마디 남는 점이 없는 건 아닌데, 광세천교 전은 엄청 재미있었는데 흑영신교 전은 왠지 되게 길다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밀도 높았으면 길다고 못 느꼈을 텐데, 광세천교 전은 여태까지 쌓아온 걸 잘 쏟아부어서 와 쩌는데 이런 느낌이라면 흑영신교 전은 그런 느낌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와 커다란 위기구나!' '근데 위기가 되게 길구나!' 이런 느낌? 그냥 형운한테만 팍 집중해버리지. 그래도 교주가 전부터 계속 나왔던 캐릭터라서 그 종말만으로도 충분히 장면의 깊이가 있었지만.
아무튼 간에 재밌었다.
여러모로 정말 흥미롭고 완성도 높은 동양계 판타지 세계관이었다! (별표 열 개)
인물들의 묘사 역시 필력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부분이라 와 얘 나오는 씬에서 감동 쩔었어 뭐 이렇게까진 못해도 백스토리가 다들 정말 매력적이었고.
자기가 판타지 소설을 볼 만한 동심이 남아 있는 독자라면, 그러니까 이 리뷰를 여기서 보고 있는 거긴 하겠지만, 아무튼 그런 독자라면 일독을 권할 만한 소설이다. 김재한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정신없이 활약하는 형운에게 마음 놓고 이입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김재한 작가가 이 소설을 뛰어넘는 소설을 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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