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so good 어벤져스 엔드게임 리뷰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얼마간 실망했었다.

 절대악이던 타노스의 동기를 우주를 살리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캐릭터 스토리 서술은 빈약해서 입체성이 부족했고, 가모라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장면은 어디선가 지나치게 많이 본 사연 같아 기대했던 만큼의 포스보다는 제법 진부한 악역이었다.

 특히 전쟁에 대해서, 이건 사견이지만 사실 언제나 나는 히어로들이 왜 꼭 저렇게 싸워야 하나 궁금했는데 마치 변신 만화에서 변신할 때 건드리면 안 되는 것처럼 분명 더 효과적인 살상 방법이 있을 것 같음에도 방패로 후드려패고 싸우잖아?

 이건 히어로 영화를 보는 숙명 같은 거니까 예컨대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처럼 일종의 전제로 받아들이고 넘어가야 하는건데, 전쟁씬을 보면서 참 웅장하긴 했지만 '저게 지구의 최선이라고?'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난 뭐 전쟁 영화처럼 좀더 처절하고 으리으리할 줄 알았지... 서로 단거리 달리기하는 것처럼 뛰어가서 박잖아!

 한 마디로 재밌긴 했는데 의외성이 부족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가장 나았던 부분은 그래서 결국 주인공 진영이 패배로 끝난다는 것. 가장 재밌던 부분은 토르의 여정.

 그런고로 어벤져스빠심에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들었지만 리뷰를 쓸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실 엄청나게 실망하거나 엄청나게 감탄하지 않는 이상 뭔가에 대해 잘 리뷰를 쓰게 되진 않잖아.

 포카칩을 먹었는데 안에 벌레가 들어 있거나 신상인데 엄청 맛있다면 한두 마디하겠지만 그냥 전에 먹어본 그 맛을 기대하고 이미 알고 있는 가격으로 사서 딱 그 맛이 났다면 굳이 그걸로 무슨 반응을 남기지는 않는 것처럼.

*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그런 면에서, 완벽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에 멎었던 내 시간을 멱살잡고 끌어당겨서 후드려패고 울게 하는 느낌.

 처음부터 끝까지 의외성으로 가득찼고, 마블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그에 상통하는 히어로성, 그리고 감동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진부하지 않기란 어려운데 전혀 진부하지 않았고.

 애초에 시작부터 타노스 대가리를 댕강 자르고 시작하는 것부터 '뭘 생각하든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이상으로 재밌어질 거야'라고 갈기고 들어가는 느낌이지.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실패로 끝난 타노스 결전 이후, 타노스에게 있을 인피니티 스톤을 다시 모아 살려내기 위해 잔여물 친구들은 다 같이 힘을 합쳐 들타노스한테 쳐들어간다. 웬 뉴페이슨가 했는데 나중에 깨달은 캡틴 마블이 여기에 가세하는 것은 덤.

 그런데 인피니티 스톤은 이미 없었고 타노스는 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스톤의 힘을 사용하는 데는 대가를 치러야 하고, 스톤을 도로 없애버리기 위해 스톤의 힘을 전력으로 끌어내 다시 사용한 타노스는 털 것도 없는 거지에 불구가 되어버려 있던 것.

 그대로 패배의 5년이 흐르고,

 이제 여기서 전편에서 복선이 될 거라 생각했던 스콧 랭이 튀어나온다.

 무려 천사백만 분의 일 확률로 쥐 새끼가 우연찮게 버튼을 잘못 건드려 도로 현실세계로 튀어나온 앤트맨 씨는, 양자역학 세계에서의 시간과 현실세계에서의 시간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다.

 아니, 5시간이 5년이었다니?

 큰 깨달음을 갖고 돌아온 스콧 랭과 조우한 일당은 타임머신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해내고,

 어벤져스는 다시 한 번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뛰어넘어 싸운다.

 *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구태의연할 거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엔드게임이라는 의의가 의외성에 큰몫을 더했다. 대미를 장식한다는 명분으로 맘껏 은퇴시켜줬잖아. 마지막에 캡아는 상상도 못했다.

 특히 시간을 넘는 싸움에서 보여준 마블 특유의 감성은 엔딩의 감동과 대비되어 히어로 영화로서의 가치를 더하는 것 같다.

 이건 딱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캡틴 아메리카의 '하일 하이드라'와 아이언맨의 'I, AM, IRON MAN'

 정말 잊지 못할 거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션을 수행하러 가는 장면에 '모든 걸 걸고,' 라는 말이 사실 '무슨 짓을 하더라도'라고 whatever의 느낌을 살려직역되었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제작진의 의도라고 생각되진 않아서 너무 깊게 파고든 게 아닌가 싶지만 재밌는 해석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어벤져스 인피니티에서 '우리는 생명을 거래하지 않아'라고 타노스의 대의에 맞서던 어벤져스 멤버는 저렇게 말하고서 이제 타임머신을 타는데,

 나타샤는 자기 목숨을 희생하고 아이언맨과 헐크는 목숨을 걸고 손가락을 튕기고

 시빌워를 치를 정도로 고지식하던 캡틴 아메리카는 '하일 하이드라'라고 외친 후 위기를 모면한다.

 하긴 마지막 코인이잖아, 니네! 당연하지.

 더불어 어벤져스를 처음 본 게 내가 고3일 땐데

 말 그대로 'END'에 어울리는 엔딩들을 보면서 어벤져스와 지나온 세월들이 여운에 한층 그 깊이를 더한 것 같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에반스, 스칼렛 요한슨...

 어벤져스로 이 멤버들을 다시 못 보다니.

 제발 누가 살려줘!

 *

 영화를 보고 온 지 한 시간도 채 안 지났다.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때 리뷰를 쓰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반대로 이 여운이 가시지 않았을 때 리뷰를 쓰고 싶기도 했다.

 사실 이건 리뷰라고 하기엔 뭐하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한 거다. 그니까 영화를 보자마자 누군가한테 떠들고 싶었어.

 근데 참 이게 누구 잡고 감동했답시고 스포하면 죽을 수도 있는 영화라...


 내 점수는 4점 만점에 4점! 다분히 팬심이 반영되었음.

not bad 쥬논 - 하라간 장르소설 리뷰

 실망이 크다. 누군가의 평에 따르면 꾸준히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얼마 안 되는 작가라 했는데, 그 말이 맞는 성 싶다.

 시작은 거창하다.

 남부 연합 카롤 왕국의 3대 검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검수, 루잉 드뷔시 백작은 왕세자와 아내의 불륜을 발견하고 북부 전선 너머로 나아간다. 죽음을 각오하고 대성벽을 넘는 그는 신의 뜻에 목숨을 맡기리라 각오를 품은 채 솔샤르들과 격전을 벌인다. 한 평생을 품어온 충성의 기치와 증오로 가득찬 복수의 기치가 심중에 부딪치는 가운데, 살아 돌아오면 신이 그의 복수를 허락한 것이며 죽으면 그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전장의 한복판 깨달음을 얻고 자신조차 모르는 곳으로 나아가던 루잉은 북부의 아홉 군주 중 하나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그가 데려온 어느 귀족 소년에게 빙의하는데, 그 이름은 하라간. 이 작품의 시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두사미였다.

 세계관은 흥미롭다. 북부의 솔샤르들은 마물들과 결합하는 인간이며 남부는 마나를 다루는 초인들이다. 북부의 아홉 나라는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다.

 문제는 이 작품이 다시 없을 먼치킨이라는 점이다. 하라간은 시작부터 마물들의 신, 마신과 결합한다. 그냥 먼치킨도 아니고 묘사를 보면, 하라간이 진심을 낸 순간 하라간의 행성은 먼지처럼 사라질 수 있는 수준이다.

 그 힘을 최대한 억제하다 보니 등장인물들의 시선으로 지지부진한 갈등만이 이어진다. 하라간이 진심을 보이고 북부의 아홉 나라를 통일하는 것은 작품 극후반부이다. 그럼 그 전까지는 뭐하냐?

 하라간의 무력을 모르는 다른 인물들이 암수를 부리고 그럼 뒹굴거리다가 후후훗 하면서 깨는 게 전부. 이걸 어떻게 반복하는 느낌을 안 주면서 그나마 끝까지 보게 한 작가의 필력은 기성작가라 할 만한데, 솔직히 말해서 쥬논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면 다 볼 이유는 없었다.

 먼치킨을 들이밀었으면 그에 맞는 세계관의 확장을 시도하던가, 먼치킨 외적인 쪽에서 재미를 보여줘야 한다. 질풍광룡은 주인공이 먼치킨이지만 인중최강일 뿐 그에 맞는 초월적인 적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인공의 인생 역경을 보여줌으로써 작품을 재밌게 일구어낸다는 점에서 제법 재밌게 읽었다.

 하라간은? 세계관은 이미 북부와 남부로 짜놓고, 진심을 내면 그냥 가루가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 독자는 이미 반쯤 결말을 예상하고 보는 셈이다.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 작품은 당연히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하라간의 캐릭터 묘사가 재미있는가? 샤피로는 앙신의 강림과 천마선을 지나서 완전히 사이다패스 캐릭터에 천착했다. 하라간은 루잉을 지나 냉혹한 절대자로서 감정적으로 완성된 캐릭터일 따름이고, 뻔하게 재미가 없다.

 북부와 남부는 1권에 끝내고 문지기 같은 설정을 들이밀었으면 다른 차원으로 가던가, 아니면 사실 그에 걸맞는 초월적인 적들이 여럿이었던 셈으로 적수와 맞부딪는 전투씬(학살씬 말고)을 조금이라도 넣던가...

 작가는 마지막 한 권의 짤막한 결말을 위해서 열다섯 권을 소비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이지 열다섯 권이나 될 필요가 없었다. 길어야 너덧 권 안에 압축할 수 있을 만한 소설을 다른 등장인물의 시선을 빌려 늘이고 또 늘이고 또 늘렸다.

 다시 강조하건대 용두사미라는 말이 어울린다.

good 납골당의 어린 왕자 장르소설 리뷰

(스포 및 사족)

 소행성에 자리했던 어린 왕자는 장미를 벗삼아 살았지만, 납골당의 어린 왕자는 현실의 인연을 장미로 여기고 버팁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던 어린 왕자의 시각을 그대로 가져오진 못한 셈이죠. 사실 동화가 아닌 이상, 그래서도 안 되겠고요.

 따라서 납골당의 어린 왕자는 서술 방식에 있어 대유법을 무척이나 자주 사용합니다. 소설적으로 좋다고 하기는 힘든 문장들이죠. 동화적 서술을 거부한 이상 아예 소설로 나아가고, 장미 등에 대한 생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결말부의 단 한 문장으로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서술로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짐작해내지 못한다면 그냥 거기까지인 거죠. 그러나 장르소설이니만큼 이러한 문장들이 재미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살펴서 말하는 게 옳을 겁니다.

 앞서 말한 대유를 포함해, 작가의 전반적인 서술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사들은 문어체로 쓰여지고 각 캐릭터들은 자기만의 철학을 장문으로 읊으며, 주인공의 내면 묘사는 앞서 말한 대유를 사용한 문장들로 독자들에게 건네집니다.

 주인공의 내면 묘사는 지나치게 반복 서술되는 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납골당에 들어가게 되는 과거 장면은 작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실상 ‘주인공의 돌 구르는 소리’ 하나로 요약이 가능하고, 초반 현실 몇 편만으로 대충의 경위를 이미 알고서 보는 독자 입장에선 결말을 알고 보는 비극을 가능한 한 상세하게 틀어주는 셈입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내면 묘사는 앞서 말한 대유를 활용해 끊임없이 서술되는데, 가상현실 게임에서만 나왔다면 많다고 여기지 못했을 내면 서술은 현실 장면에 겹쳐 지나치다는 느낌을 와닿게 합니다. 왜냐하면 현실 파트의 진도가 안 나가기 때문입니다. 캐릭터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정해져 있고, 이 구도에 대한 비극적 심리 묘사는 반복됩니다. 

 결론 부분에서 한 번이나 두 번의 방점으로 끝난다면 몰랐을까, 같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번 되풀이되는 함의적인 문장은 이미 함의가 아닙니다. 그냥 반복이죠.

 가상현실 게임의 문장은 그 방점으로 기능하기에 충분했습니다만, 고건철이 가을을 발견하고 새로운 구도를 형성하기 전까지 현실 파트는 평면적 캐릭터 묘사 외에 아무런 기능이 없습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캐릭터 설명의 당위성을 제외하고요. 진도가 안 나간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현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게 하고 추리식으로 풀어가게 하거나, 혹은 대유를 제외하고 무척 건조하고 짤막한 서술로 끝났어야 했습니다. AI와 관리자의 대화 파트 분량 정도면 괜찮겠네요. 독자는 작가가 굳이 그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경위만으로 감수성을 재생산할 능력이 있습니다.

 캐릭터들이 읊는 장문의 철학은 작가가 그 순간 캐릭터의 입을 빌려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하고, 그 착각은 문어체에 겹쳐 더해집니다. 캐릭터의 통일성이 아니라 캐릭터’들’의 통일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철학에 대해서는 그럴 만한 위치의 사람들이 이따금 읊을 뿐이므로 도리어 작품 전체의 질을 풍미롭게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철학을 겸비하여 문어체로 이루어지는 대사들 중, ‘~걸’로 끝나는 어미에 대해서, ‘그럴 걸?’ 혹은 ‘거기 있는 걸 여기로 가져 와.’와 같은 사용법이 아니라 문장을 저와 같이 끝맺는 사용법을 저는 현실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일본 애니를 제외하고요! ‘~걸요’에 이르면, 마치 교과서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캐릭터 중 하나의 말습관으로 한정했다면 좋았겠지만, 여러 캐릭터가 공유하는 말습관은 작가가 문장 끝에 와도 좋다고 생각하는 어미 여러 개를 정해두고 단순히 대사가 일색이 아니도록 돌려 쓰는 것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만듭니다.

 이 의심은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구독자 대화 묘사에 힘입습니다. 단, 전체를 평하자면 이와 같은 의심들은 옥의 티일 뿐이지 각각의 캐릭터성은 작품 전체를 견인하기 충분할 정도로 그 색채가 달랐다고 말하고 싶네요.

*

 옥의 티라고 말한 것처럼 굳이 짚고 넘어가야 할 단점들은 아니었습니다. 끝이 좋은 소설은 다 좋은 법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 단점들을 굳이 짚고 넘어가게 한 단 하나의 실망이 있습니다. 소설의 엔딩!

 작가가 보여준 여러 사유의 깊이에 반해, 작품의 결말은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소설의 끝은 결국 겨울이 봄을 긍정하고 세상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도록 하는 점으로 끝납니다.

 drc 하나 깔지 않고 게임을 플레이하던 겨울이 막판에 와서 현실에 drc를 설치하는 셈이죠. 팩의 이름은 [기계장치의 신 - 신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세상] 정도가 되려나요? 봄의 조치가 딱 그랬거든요.

 상세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할 말이 무척이나 많겠지만, 작중에 서술된 대화에만 한정해 엔딩에 대해 언급하자면, 봄이 신으로 세계에 등극한 시점에서 바로 봄이 말했던 그 위선의 짐을 짊어지게 된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를 배려하는 조치로 말미암아 세계의 변화는 완만하고, 신이 있는데 여전히 독수리 옆에서 쪼아 먹히기를 기다리는 소녀가 생긴다는 점에서 악질적인 위선입니다.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선의로 수렴하는 우연을 확정짓는다는 점에서, 이제까지 명백히 사람들의 손으로 자아지던 세계는 결국 신에 의해 운명지어지고 만 셈입니다. 운명론적 세계관도 아니고, 그냥 운명의 존재가 기정사실이 된 세계입니다. 인도아대륙에서 발원한 종교는 그 유명한 불교를 포함해 철학적인 면모를 겸비합니다만, 그 철학자들이 겨울의 긍정을 보았다면 무어라 말할지 궁금합니다. 특히, 시크교를 믿던 싱 대위 말이죠.

 이 작품의 엔딩은 하나의 명제를 전제로 합니다. ‘인간의 선의는 믿을 수 없다.’ 겨울은 결국 인간의 선의를 믿기를 포기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겨울이 이끌어오던 이 소설의 결말은 절대로 해피엔딩이 될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겨울의 배려는,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정도지, 독자를 감명케하는 인간찬가로서의 대답과는 백만 광년 정도의 거리가 있습니다.

 저 전제가 이 소설의 엔딩을 실망스럽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새드엔딩은 새드엔딩 나름의 재미가 있는 법이니까요. 아쉬운 건 결말의 서술 방식입니다.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결말에 대해, 작가는 독자에게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합니다. 겨울은 행복해지고, 그 선택이 최선이었던 것처럼 서술하며, 그 외의 시선을 거부합니다.

 모든 소설은 결국 작가의 어렴풋한 생각 한 구절을 소설로만 가능한 말하기 방법으로 길게 돌려쓴 거고, 훌륭한 소설일수록 결말로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를 남깁니다. 다른 해석의 여지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운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거부는 막판 작가가 드러내보이는 겨울의 캐릭터성과 밀접합니다. ‘나도 사람의 가능성이었잖아,’ 라고 말하는 겨울의 대사는 즉 그 자신이 선의로 투철한 초인이라는 반증입니다. 내적으로 다른 인간과는 차별된 상위 인간 정도가 되겠습니다. 디스토피아에 익숙해진 다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부조리를 겨울은 알고 슬퍼했다, 정도에서 갑자기 초인으로 건너뛰는 셈입니다. 더없이 인간적이었던 겨울의 과거와 심리 변화에 대해, 특히 그 심리 변화가 정말로 기적적인 사람의 가능성으로 종착했는가에 대해 의문이 남습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얼마간 이러한 대사가 나올 여지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겨울을 기적적인 사람의 가능성 정도로 얘기하기에는 정말 부족합니다. 인간의 선의를 믿지 못하고 신에 의존하기를 선택한 인간이 어떻게 초인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작가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 인간이 한때 자신의 죽음마저 체념했던 염세주의자라는 점에서는 더더욱. 따라서 이 초인은 그냥 우연의 확률로 AI와 상호작용할 수 있게 태어난 운좋은 상위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 초인이 선택한 인간의 패배를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차피 태생부터 완벽한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결말이라면, 달리 해석할 만한 여지 정도는 남겨두아도 좋았을 텐데요. 어딘가 찜찜한 결말, 분명 선의로 행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영생하는 독재자의 출현이 될 수밖에 없는 해석의 여지를 몇 토막만 남겨두었어도 이 정도로 아쉽진 않았을텐데, 도대체 해피엔딩으로 읽히지 않는 소설이 동화처럼 깔끔하게 끝나버리니 반대로 찜찜합니다.

 ‘봄이 있으라’라고 했는데, 결말과 연결지어 해석하자면 ‘전능한 신에 감복하라’가 되겠습니다. 인간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동화 같은 해피엔딩이었네요. 작가가 원래 구상했던 엔딩이 무척 흥미롭다는 점에서 더욱 아쉽습니다.

 이외에도 짚고 넘어갈 게 없지 않습니다만, 느린 진행과 반복되는 서술이 만드는 평면적 캐릭터, 찜찜한 엔딩 정도가 이 작품에 대한 실망이 되겠습니다.

 아쉬운 점에 길게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무의미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재미있는 소설만이 독자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죠. 가능한 한 길고 즐거운 시간을 선사해줄 소설을 애타게 찾는 독자에게 납골당의 어린 왕자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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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종말에 대한 사유가 있었습니다. 지구 최후의 날 기계에 대한 시나리오나 전뇌사회로서의 매트릭스, 어느 날 전염병이 돌아 좀비들이 출몰할 수도 있겠고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질지도 모르죠.

 이러한 가정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세상에 솔직하기 어려운 어른이 많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많은 작가들에 따르면, 멸망을 앞둔 세계에서 인간은 거추장스러운 한 꺼풀을 벗습니다. 기정사실이 된 죽음 앞에서 비로소 인간이 솔직해지리라는 생각은 여러 창작물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입니다.

 한 프랑스의 비행기 조종사는 솔직하지 못한 어른들에 대해, 그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소년의 시각을 내세워 이야기를 썼습니다. B612 소행성에서 날아온 어린 왕자의 담론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유효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또다른 누군가가 설득력 있게 가정해낸 B612의 어린 왕자가 있습니다.

 22세기, 인권 이전의 선의를 경시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현대 사회의 첨단을 달리던 대한민국은 마침내 인간의 사후를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사후보장보험이 운영되는 세상에서 한국인들은 죽기 위해 살아갑니다. 아기는 가상현실을 이용한 양육기 속에서 길러지고, 생전의 납부 금액에 따라 가상현실 속 한국인의 사후세계는 등급별로 나뉘죠.

 대한민국 납골당의 등록번호 B612에 자리한 한 소년은 이제 스물여덟 번째 종말 이후의 세계를 꿈꿉니다. 여러 명이 꿈꾸었던 세계이지만, 그 세계를 풀어나가는 소년의 해법은 기만에 익숙해진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낯설다 못해 멍청하게만 보입니다. 소년은 남들과 다른 솔직함으로 꿈 속에서나마 자신과 타협하기를 거부합니다.

 [납골당의 어린 왕자]입니다.

 소년은 죽음을 무릅쓰고 좀비와 맞서 남들을 구원합니다. 돈이 없는 소년에게 가상현실에서의 죽음은 현실의 폐기처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소년의 태도는 진실성을 띱니다. 그 초지일관한 태도는 현실에 대한 소년의 체념에서 비롯하는데요.

 기만으로 가득한 현실에 대한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로 비유되는 소년의 인연에게 헌정하는 게임 플레이는 아슬아슬한 비탈을 걷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게임 플레이를 넘어서 작가가 풀이하는 좀비가 창궐한 세계의 모습은 무척이나 매력적입니다.

 낙오된 일개 생존자로서가 아닌, 몇몇의 나라는 사라지고 몇몇의 나라는 아슬하게 버텨나가는 세상 ㅡ 미군으로서 작전에 돌입하여 작전 지도자로 성장한다는 선택지는 이제까지의 한국 장르소설에서 드물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지 않는 주인공의 게임 플레이가 현실에서 혹은 게임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 읽는 내내 독자의 흥미를 돋굽니다.






(조아라 노벨마스터로 선정되어 작성한 글입니다)

blog.naver.com/joara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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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무한전생-사냥꾼아크 #광악 #조아라 #퓨전 장르소설 추천사

#조아라 #웹소설 #퓨전 #무한전생 #4점만점에3점 #광악 #사냥꾼아크 #안멸망한세상의사냥꾼

패러디와 팬픽이란 조아라에선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패러디는 다른 창작물을 보고 써낸 2차 창작을 의미하고, 팬픽은 연예인들을 소설에 등장시키는 장르를 뜻하죠. 여주 패러디는 어떤 루트를 타는가가 아주 중요한 작품의 방향이 되기도 합니다.

개중에서도 남주 패러디를 쓰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재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원작의 작가가 미처 생각하지 않은, 혹은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은 작품의 여백을 파고들어 분명 원작을 제재로 써냈는데도 독창성을 띠는 것, 다른 하나는 먼치킨 오리주를 작품 안에 떨궈서 미친 듯이 강해지는 것.

전자의 대표작으로는 [탈혼경인]이 있겠죠. 후자는 너무 많아서 세기도 그렇지만, 제가 좋아하는 패러디 작가의 하나인 허무정의 페그오 패러디 작품을 꼽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패러디의 유행 중 하나로 한때 무한전생 붐이 있었습니다.

먼치킨 오리주 패러디를 쓰다 보면 이 짱짱 센 설정으로 이 패러디도 저 패러디도 건드려보고 싶기 마련인데, 작품을 새로 파기는 그렇고, 주인공이 무한전생을 한다는 설정으로 이 챕터 저 챕터 여러 패러디를 건드리고 다니는거죠.

지금은 찾기 드물어진 이 무한전생 모티브를 집어들어 새롭게 자신만의 작품으로 재창작해낸 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광악 작가입니다.

자급자족 이계생활기로 노블레스 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광악 작가는 이후 무한전생 시리즈로 연속적인 성공을 거두는데요, 이번 무한전생 - 사냥꾼 아크는 그의 다섯 번째 무한전생 시리즈 작품입니다.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 어느 세계에서 죽더라도 결코 완벽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다른 세계의 인물로 환생하고 마는 주인공, 그때그때 이름을 달리하여 살아가지만 무한한 시간을 살아온 그에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점이란 바로 권태로부터 비롯한 광기입니다.

지나치게 긴 시간을 버텨온 나머지 인격이 교체되기는 수십 번, 너무 강해졌을 때는 자살하기 위해 온 세상을 적으로 모는 대학살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모습을 지나온 주인공은 이제 안빈낙도의 삶을 지향합니다.

실리성을 중요시하는 주인공은 본인이 원하는 평온함을 위해 이번 생에서 필요한 만큼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무한전생으로 누덕누덕 몸에 붙여온 재능들은 그를 돋보이는 존재로 만듭니다.

별 것 없는 고아로 태어나 사냥꾼 아크로 거듭나기까지, 무한전생 사냥꾼 아크의 일대기입니다.

이과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필력으로 재치있게 풀어내는 작가와 더불어 무한하게 전생해온 주인공의 성격은 전편을 읽지 않아도 재미있습니다.

http://www.joara.com/literature/view/book_intro.html?book_code=1332347






(조아라 노벨마스터로 선정되어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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