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어벤져스 3 : 인피니티 워> 영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에는, 세계의 농업생산력은 120억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데 60억 인구 중 30억은 여전히 굶주린다는 내용이 해설되었다. 한참동안 잊고 있던 그 책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교양 수업에서 게임 이론에 대한 설명을 듣던 도중이었다. 모두에게 최선이 될 수 있는 선택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그 이론을 들으면서 나는 인류 절반이 겪는 불합리한 굶주림의 본질에 대해 뭔가 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라면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이하 어벤져스3)에는 그러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타노스다. 작중 우주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지성체의 인구는 점점 늘어간다. 여러 행성이 멸망하는 가운데 타노스는 인구를 줄이면 된다는 해답을 내세우고, 전능함을 부여하는 인피니티 스톤을 찾아 우주를 구원하려 한다. 지구의 영웅들은 그런 타노스를 미치광이로 규정하고 인피니티 스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결국 갈등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전체는 부분에 우선하는가?


타노스와 영웅들이 싸우는 이유는 이에 대해 서로 다른 사유가 부딪치기 때문이다. 우주가 겪는 인구 문제에 있어, 타노스는 구성원 개인이 가족 등을 잃는 불행을 겪더라도 전체의 안위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위해 타노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즉 타노스에게 있어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될 수 있는 개념이다. 반면, 지구의 영웅들은 개인을 우선한다. 영웅들은 타노스가 내세운 방법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집단의 구성원이 집단을 위해 희생되는 것은 영웅들에게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언뜻 이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 이미 우리는 해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중순, 세계대전이라는 과오를 통해 전체주의는 옳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벤져스3에서 타노스가 내세우는 ‘전체’는 국가가 아니다. 말 그대로 우주의 ‘모두’를 말하는 것이고, 타노스는 따라서 공익의 기치를 내세우는 인물이 된다. 우주의 파멸을 막기 위해 다소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일단 옳은 선택을 하자는 것이다. 그에 반하면 영웅들은 다분히 개인주의적이다. 미래의 우주가 어떻게 되든 일단 본인들의 터전인 지구를 지키려 한다. 그렇다고 대안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며, 당장 눈앞의 희생을 볼 수 없을 뿐이다. 말 그대로 ‘개인’을 위한 선택, 따라서 타노스가 던진 난제는 해답이 없는 가치판단의 문제로 비화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예전부터 오랫동안 철학에서 다루어왔던 딜레마 중 하나다. 살면서 이와 비슷한 많은 가치판단의 사례를 겪기도 한다. 타노스의 난제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국가, 인류를 넘어선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세상을 지키기 위해 희생이 필요한데, 그게 나라면? 영화는 궁극적으로 다음의 선택지를 감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피니티 스톤을 손에 넣은 타노스가 인구의 절반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죽는다. 즉 나만 살고 모두가 죽던가, 모두를 살리기 위해 내가 악역으로 전락하던가.


최선의 합의가 희생을 전제로 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가장 적은 비용을 감당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할 것인지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이미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희생을 겪고, 때로는 남에게 그 희생을 같이 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해 자가용을 되도록 이용하지 않는 것은 이미 합의된 희생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타노스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은 타노스가 인구의 절반을 무작위로 소거하면서 본인까지 그 범주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본인의 생존에 대해 놀랐다는 것이다. 최소한 본인만큼은 희생 당하는 것에 동의한 셈이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크고 작은 대의에서 우리가 가장 옳은 타결을 위해 어떤 희생을 필요로 하는지, 그 희생이 타노스가 만들어낸 것처럼 합의되지 않은 강요라 해도 여전히 고개를 끄덕일 것인지 한 번쯤은 우주적으로 생각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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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대신 내는 과제였는데
제발 B 밑만 나오지 않기를

good 멸망한 세계의 사냥꾼 장르소설 추천사

멸망 이후의 세계란 어떤 모습일지 이따금씩 상상해보고는 합니다.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한 한 폭력적인 가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문명이 멸망한 세상에서 피식자의 위치로 전락한 인간의 생존 방식은 대충 생각하기에도 그닥 영광스러울 것 같진 않죠.


사람들 안에는 어쩌면 선사시대 적 야만에의 열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도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런 가정에 대한 비참한 답을 내놨고, 그 안에서 인간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 마지막 인간으로 남아 뱀파이어들을 죽이고 외로이 횡행하거나 혹은 멸망 이전 거주 공간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지하철역에 모여 들어 국가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임모탄을 섬기고 엔진을 숭배하는 황야의 폭주족도 있고요.


이제 그들 못지 않게 흥미로운 답안지를 제시한 작품을 하나 얘기하려 합니다. 바로 멸망한 세상의 사냥꾼(이하 멸세사)입니다.


오래 전부터 세계는 멸망해 있었고, 괴물들은 황무지 위를 거닙니다. 괴물들을 죽이면 나오는 칩은 화폐, 금본위제도에서 무력본위제도로 회귀한 세상은 이제 새로운 생산자의 역할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은 그들을 사냥꾼이라고 부르죠.


사냥꾼들은 의뢰를 받고 그것을 해결해주는 대가로 칩을 받는 직업적 도살자입니다. 칩을 신앙으로 하는 사냥꾼은 그 위에 어떤 우선순위도 올려놓길 꺼려합니다. 그들은 이 멸망한 세계에서 너무 많은 가치역전의 사례들을 보아온 탓에 결국 칩만이 믿을 수 있는 단 하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진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진은 능숙한 사냥꾼입니다. 멸망한 세계가 만들어낸 갖가지 사회 군상을 감흥없이 지나치며 진은 계속해서 의뢰를 완수할 뿐입니다. 하지만 진이 단순히 그냥 능숙한 사냥꾼인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어마어마하게 능숙한 사냥꾼입니다. 심지어 악마까지 사냥할 정도로요.


도시괴담으로 전해지는 사냥꾼의 하나, 악마 사냥꾼인 진은 어느 날 평소처럼 의뢰를 이행하다가  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동행은, 소중한 것을 만들기에 이미 너무 많은 후회로 닳은 줄 알았던 악마 사냥꾼에게 조금씩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해갑니다. 그러던 와중 진은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악마와의 인연에 발을 들이밀게 됩니다.


[이제 나를 위해 살겠다]로 시작해서 [사상 최강의 매니저]로 만개했던 글쟁이S는 이 작품에서 이제까지와는 색다른 재미를 엿보여줍니다. 고독한 사나이와 소녀의 동행은 제법 높은 인기를 구가해온 클리셰고, 색다르게 장르소설적으로 해석한 멸망 이후의 세계관은 작가가 그리는 일행의 여정에 완성도를 더해줍니다.


좀비나 바이러스를 넣지 않고 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려낸 작품은 드물고, 그 중 생존성이나 주인공에 대한 편의성 없이 그 자체로 작품을 매력적으로 가꾼 글은 더더욱 드뭅니다. 하물며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들임에야, 작가는 어떤 글을 독자가 읽어볼 만하다고 여기는지 잘 숙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이 괴물들에 어떤 식으로 맞서는지, 그리고 방랑하던 악마 사냥꾼이 한 소녀로 인해 어떤 식으로 변화해가는지 흥미가 돋는다면 읽어보실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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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스포 및 사족)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사실 재밌는 작품일수록, 조금의 흠결도 더 재밌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깊게 남는 경우가 많죠. 멸세사도 그렇습니다.


멸세사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작가가 보여주는 작풍의 변화입니다. 예컨대 [나를 위해 살겠다]는 흔한 회귀물로 시작해서, 회귀 전 악연에 대한 주인공의 복수 장면에서 제법 흔치 않은 회귀물로 변화합니다. 회귀 이후 주인공의 캐릭터성을 형성하는 것 자체가 그 복수심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완수한 주인공의 캐릭터에는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변화를 작가는 괜찮은 방식으로 해설해냅니다. 전체 비중을 따지면 사건 묘사가 9에 감정 묘사가 1이라고나 할까요.


[사상 최강의 매니저](이하 사최매)는 [나를 위해 살겠다]에서 작가가 다른 회귀물과 차별화되었던 점을 더욱 앞으로 내세운 작품입니다. 흔한 레이드물 같지만 세계관이 완성도 있고, 주인공이 가진 비밀이 조금씩 풀려 나오면서 결국 파탄으로 치달아가는 전개는 무척 씹을 맛이 납니다. 글쟁이S가 다른 작가와는 다르구나 하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건 묘사 8에 감정 묘사 2쯤? 재밌는 건 사최매 작중 흐름에 따라 문장의 묘사도 변한다는 점입니다.


엄청 간결한 편까진 아니지만 딱 적절한 정도의 가독성을 갖고 있는 문장들은 캐릭터의 감정이 격해지면서 색다른 지분을 갖고 문단으로 부연되는데, 작가가 개입해서 철학적 서술을 하고 그에 따라 캐릭터의 여운을 남기는 방식입니다. 설명체죠. 감정선이 깊어질수록 설명체의 비중은 높아집니다.


그리고 멸세사에서 이 작풍의 변화는 고점에 도달하고야 맙니다. 멸세사는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2부만 따져 보면 사건 묘사 6에 감정 묘사 4 정도가 되겠네요.

개인적으로는 멸세사의 1부를 생각할 때 2부가 좀더 괜찮은 방식으로 쓰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개에서도 그렇고 서술 방식에 대해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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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가 악마사냥꾼으로서의 진과 일행의 여정이라면, 2부는 악마사냥꾼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진과 일행의 여정입니다. 즉 1부에서 소중한 인연을 만들고 그들 일행의 여행을 그렸다면 2부는 이제 그 일행들 간의 재회 및 대적에의 타도를 그리는 일대기입니다. 그런데 2부는 소중해진 인연들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서, 1부와는 소설적인 성격이 사뭇 다릅니다.


2부는 뿔뿔히 흩어진 일행의 재회와 내전, 그리고 칼츠에 대한 대적으로 진행됩니다. 후기에 보면 작가가 개인적으로 힘들어서 집필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는데 아마 전쟁 장면과 그 후의 어딘가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전쟁은 산만하다 못해 정말 너무 긴 감이 있습니다. 사최매에서 보여줬던 밀도 높게 처절한 전투 장면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일행은 뒷전으로 작중 전쟁은 그저 수행될 뿐입니다. 샤를과 소서란의 대치 구도가 그나마 캐릭터의 대치 구도라 할 만한데 이마저도 그닥 공감가진 않습니다.


이러한 전개 와중 문장은 점점 짧아지고 엔터를 자주 띄우며, 주어를 작가로 하는 작가 개입 문장이 극도로 많아지면서 독자의 감정을 고조하려고만 합니다. 소서란의 절망 장면에서 그런 감정적 서술은 무척 슬프게 그려지지만, 그 후로도 계속해서 나오는 감정적 서술은 1부와는 다른 소설인 것 같습니다.


전쟁 이후 이제 주인공 일행은 칼츠를 맞이하러 가는데, 1부에서 현실적인 악당이었던 진은 2부에서 인간찬가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실 칼츠가 아닌 진이 모든 것의 근원이고 칼츠의 의도가 올바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려 한다는 건 식상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만, 결국 싸우기로 결심하면서 칼츠를 이겨내는 주인공 일행의 묘사는 흡사 절대악에 맞서는 의지의 표상 같습니다.


문장 묘사는 감정적 서술의 절정을 맞이하고 전개는 그에 부합하게 열기를 띠어가는데, 작가의 작중 해명에 납득해주냐 마냐의 문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싸움에서 끝내 캐릭터의 일관성까지 고조되는 감정선에 묻히고야 말았다고 느꼈습니다. 죽도록 사랑한다던 프레이는 람필을 애걸하기보다 포기해버리고 극악무도한 우두머리였던 소서란은 차마 팔다리 자른 샤를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칼츠에 대한 살의를 불태웁니다.


특히 바로 얼마 전까지 동생의 죽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천제에게 구걸했던 소서란이 칼츠가 동생을 살려주겠노라 하자 거짓말임이 분명하다며 그게 가능하더라도 기만하지 않기 위해 안 살린다는 둥의 소리를 하는데, 얼마 전 느꼈던 비애가 무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레오네와 칼츠는 누가 더 철학적으로 옳은지 싸우면서 떠들죠.


멸망한 세계는 모두에게 가혹한 생존 방식을 강요하고, 주인공 일행은 강요 당하는 걸 넘어서서 그 약육강식을 행동 양식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옳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죄없는 군인들을 마구 학살하면서 시체로 되살려내는 소서란에 동조해서 재앙을 확대시키죠. 꼭 그것만이 아니라도 일행 스스로도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일행에 대한 서술은 레오나에 대한 진, 일행의 서로에 서로에 대한 애정을 부각하면서 어떻게든 서로를 위해 싸워나가는 일행을 말 그대로 ‘주인공’스럽게 그려내기 때문에, 반대로 말해서 그런 그들의 감정선은 전개에만 합치될 뿐 이전까지 보여줬던 캐릭터로서의 일관성이 다소 매몰된 느낌이 듭니다. 거기다가 사최매와 달리 일행에게 주어지는 비극은 소서란의 것을 마지막으로 극복 불가능한 비극이라기보다는 어떻게든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이겨낼 수 있는 역경일 뿐입니다. 란필이 차라리 소서란만한 감동과 함께 죽었다면!


인간찬가라고 한 이유를 이젠 아시겠죠. 그것도 한계를 갖을 수밖에 없는, 매우 모순적인 인간찬가입니다. 어차피 개새끼들과 개새끼들이 맞붙는 셈인데, 구태의연한 해피엔드보다는 처절하고 비극적인 언더독 싸움이 더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사최매처럼요.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을 그려내는 문장 서술은 사최매에서보다 더욱 감정적인 경향이 강화되어, 캐릭터의 이야기보다는 감동을 쥐어짜내는 작가의 말소리를 직접 귀에 꽂아 듣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애써 많은 걸 얘기하려 하지 않고 절제된 묘사만으로도 이미 독자는 슬픔이나 감동에 취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요.


결말은 비극이라면 비극인데, 2부를 다 읽어가던 끝에 저는 4억년이라는 예정된 시간에 좀 안심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이렇게 긴 세월만은 어떻게 꿉꿉한 식으로 극복되지 않겠지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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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정도로 긴 사족은 반대로 그만큼 아쉬움이 컸다는 거고, 아쉬움이 컸다는 건 그만큼이나 재밌는 소설이었다는 걸 반증합니다. 그저 그렇게 봤다면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흠결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감상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개인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제 감상 역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입장을 담았을 뿐이지 실제로 서술 방식의 전환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글을 쓰면서 우리는 작가의 개입이 없어야 한다고 배우지만, 장르소설은 선생님이 채점하는 글짓기 과목이 아니라 시장 성적으로 채점되는 글이니까요. 결국 독자 한 명의 감상에 불과한 사족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서술체로 좋은 인기를 거둔 소설을 많이 알고 있죠. 그런 면에서 작가가 거쳐온 변화는 이런 데서 좋다 나쁘다 하기보다 차기작의 성적으로써 성공적인지 아닌지 가늠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장르소설은 작가가 만들어낸 하나밖에 없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가 다른 데서 볼 수 없이 독특하고, 캐릭터는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심지어 길기까지 하다면 오랫동안 그 안의 인물들과 같이 활보한 만큼 깨어나는데 후유증이 생길 겁니다. 멸망한 세계의 사냥꾼은 그런 후유증을 주기에 충분한 소설입니다.


주인공이 사족과 다름없는 짐덩이를 거느리는 것으로 소설이 시작되더니 추천사에도 제법 긴 사족이 달렸습니다. 후유증을 겪은 지 너무 오래 된 분, 재밌는 소설을 읽었다 하는 만복감에 젖고 싶은 분은 멸망한 세계의 사냥꾼 추천드립니다.


혼자 지내면서 일상

 혼자 살면 바빠야 한다. 

 바쁘다는 건 인간 관계로도 좋지만 인간 관계로 바쁘지 못할 사람은 자기만의 일로라도 바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롭더라.

 얼마 전엔 혼자 지냈었다. 나는 자취를 하는 중인데, 대학생인고로 내 나름의 자기계발과 학교 공부를 겹쳐 일과표를 바쁘게 짠다. 그러다가 중간고사를 보고 얼마 간 놓고 지내는데 자취방 침대에 혼자 누워 웹소설을 스크롤해대는 일상이 어찌나 권태롭고 우울한지! 문득 떠올리건대 이상의 수필 중 제일인 건 역시 권태가 아닌가 싶었다. 그만큼 공감갔고 그만큼 외로웠다.

 헤어진 지는 어언 1년이 다 되간다. 1년으로 치는 이유는 그 중에 사귀었던 것으로 치지 않아야 옳겠다 싶은 관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아 내가 그동안 혼자서 시간이 많이 남을 때도 외롭지 않았던 것은 가족의 덕분이었구나, 내가 더 나아가기 위해 어떤 방개질도 하지 않아도 절대적인 친인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존재란 얼마나 소중한지, 그런 것 따위를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친구를 사귀면 외롭지 않으리라도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마음가짐은 가족들이나 혹은 건전한 일상이 복귀하고 나면 사라지고 만다.

 아무튼 그렇다.

 본인이 친구도 없고 혼자 사는 인간이라면, 혼자서도 바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안 외롭다.

(추천사) 조아라 노블레스 무협 - not bad 싸이코패스 in 무림 / good 장소천 장르소설 추천사

<싸이코패스 in 무림> #4점만점에2점 #싸이코패스로무림에가면

차기작으로 <무한 레벨업 in 무림> 2부를 집필 중인 곤붕 작가의 작품입니다. 둘다 스탯창물인데, 그렇다고 같은 설정은 아닙니다. 차기작은 순수한 무림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회귀를 섞었는데 이 작품은 싸이코패스인 현대인 주인공이 가상현실 게임을 하다가 무림으로 전생합니다. 게임캐릭터로 무림에 간다는 점에서, Primus 작가의 대표작 <게임 캐릭터로 무림에 가면>과 비슷하죠.

시작은 게임을 하던 싸이코패스 주인공에게 사신이 찾아오면서부터입니다. 사신은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무림 세상에서 새롭게 깨어난 주인공은 자신이 전혀 다른 몸에 깃들어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실이 전혀 다른 법칙에 구속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게임 시스템입니다. 그로부터 주인공은 본인의 타고난 살인 본능과 게임 시스템을 이용해 무림인이라 불리는 살인자들 가운데서 제법 독특한 살인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Primus 작가의 작품보다는 이 작품을 더 높게 평가하는데, 바로 스탯창의 묘사에서 그렇습니다. 싸이코패스하면 보통 미친 놈, 악랄함, 냉정함 등의 이미지가 떠오르죠. 이 작품에선 싸이코패스인 주인공을 쾌락살인마라기보다 냉정한 살인마로서 묘사합니다. 보통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주어진 시스템에 마냥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그보단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 사람을 가장 잘 죽일 수 있을까부터 고민하죠.

갑작스럽게 부여된 시스템이 가진 허점을 주인공은 최대한 이용하는데, 제법 그럴 듯하면서도 흥미롭습니다. 보통 작가가 불가침의 영역으로 부연하는 기연인 스탯창이 이 작품에선 불완전하게 그려지고, 그걸 싸이코패스스럽게 써먹는다는 점에서 꽤 독특합니다.

시스템에 얽매이기보다 싸이코패스 주인공에 충실하기 때문에, 작품 역시 시스템을 이용해 마냥 성장하기보다는 주인공의 행보에 집중합니다. 초반부를 넘어서면 전개 방향이 제법 짐작하기 힘든 편인데, 완결은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완결을 예상할 수 있는 여타의 스탯창물보다 낫다고 하겠습니다.

게임 시스템을 갖게 된 싸이코패스가 무림에서 어떤 살인을 벌일지 흥미가 돋는다면 한 번 읽어봐도 좋겠습니다.

<장소천> #4점만점에3점 #투명장소천이울부짖으면?

괴량 작가의 글입니다. 사실 필명이 큰 의미가 없는 게, 작품을 다수 써냈지만 이렇다 할 시장에서의 성적이 없고 한 필명으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필명으로 엄청 많은 글을 써냈지만 단 하나도 완결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필명 아닌 악명은 높다고 할 만합니다.

이 작품 역시 연중작입니다. 연중작을 멀리 하는 사람은 이 대목에서 미리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글을 읽을 때의 재미가 연중 여부보다 우선하는 사람이라면 스크롤을 계속 내리셔도 좋습니다. 연중작을 추천할 정도로 재밌거든요.

<싸이코패스 in 무림>이나 이 작품이나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노블레스 무협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둘다 노블레스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다른 데서 시작해서 출판되었다가 노블레스에도 올라온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싸이코패스 in 무림>은 그러고보니 노블레스 연재 전에도 본 것 같다 싶은 사람이 몇몇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장소천>은? 듣도 보도 못한 작품인데 뭐지?

사실 장소천이 아니었거든요. 이 작품의 전 제목은 <건곤일기>였습니다. 웹소설 사이트를 오랫동안 이용한 무협 독자에게는 ‘아~’할 만한 책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작품이죠. 그만큼 재밌었고, 먼치킨 무협 중에선 독보적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무력에 비할 만한 먼치킨 무협이라면 임준후 작가의 <천마검엽전> 정도가 있을 텐데, 이미 초반에 엄청 강한 힘을 쥐고 활보한다는 점에서 장소천이 더 먼치킨스럽습니다.

시작은 제국을 다스리던 대제의 죽음으로부터입니다. 죽지 않는 천마는 강력한 무력으로 중원을 일통하고, 영생을 거느리며 다른 도전자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권불십년은 못 돼도 권불이백년쯤은 거느렸지만, 부동의 최강자는 결국 스러지기 마련입니다. 아끼던 이들의 배신에 위기에 처한 천마대제는 광소를 터뜨리며 마지막 남은 힘으로 자결합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자신의 몸에서 눈을 뜹니다. 그리고 전과는 같지만 다른 길을 걸어갑니다.

먼치킨 하렘이라면 하렘이라고 할 만한데, 여타의 먼치킨 하렘과 달리 장소천에게는 천마대제다운 매력이 있습니다. 절대자스러운 매력이요. 한 번 손짓으로 산을 허물고 금속을 주물럭거려 절세신병을 만드는데, 대적 못할 거라는 것을 아는 독자에게는 주인공이 헤쳐나가는 위기를 보면서 경외스럽게 쳐다보는 일행 역시 제법 흥미롭게 읽힙니다.

먼치킨에게는 그에 맞는 대적이 필요한 법, 주인공은 회귀한 세계에서 과거 자신이 몰랐던 비밀에 맞닥뜨리고 풀어헤쳐 나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엮어 나갑니다. 무협지에서 절대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묘사는 대체 뭐고 그 절대자조차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은 뭘까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아쉬운 점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이 작품이 완결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시도한 다른 모든 작품 역시 완결이 나지 않았다는 건 다분히 실망스럽죠. 무엇보다, 그냥 완결이 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 작품에 비견할 만한 작품을 거의 써내지 못해요. 이 작가가 쓴 순수 무협은 <구벽신공>이라는 다른 작품 하나가 끝이고 차기작으론 죄다 퓨전이나 판타지를 집필합니다. 그런데 장소천이나 구벽신공에서 보여준 캐릭터 묘사의 역량이 판타지에선 싼티 나는 영어 발음과 어울려 무협지만 못합니다. 아재스럽고 유치하다고나 할까요. 나중 가선 구벽신공을 판타지로 도로 뒤섞어 리메이크하는데, 그나마 나은 작품을 망하게 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거듭된 연중이 이러한 작가의 안 맞는 적성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장소천의 여정을 끝까지 볼 수 있을 날이 오면 좋겠군요.



(추천사) 조아라 노블레스 무협 - not bad 염력 쓰는 마인 / not bad 쪼렙천마 장르소설 추천사

장르소설하면 저는 일단 무협 소설이 떠오릅니다.

학교가 끝나고 퀘퀘한 만화방에 틀어박혀서 한 장씩 침을 발라 넘기던 추억, 그 즈음 장르 소설 깨나 읽었다는 독자 치고 묵향과 비뢰도를 보지 않았던 사람은 없지 않나 싶네요.

묵향, 비뢰도, 녹림투왕, 권왕무적, 신승... ... .

작가의 성향과 책의 평가는 각기 다르지만 누구나 알 법한 제목들입니다.

이제 대여점의 시대는 갔고 웹소설의 시대가 왔죠.

일단 책으로 찍어내서 인세를 받아야 돈이 되었던 전과는 다르게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돈이 되는 연재형 수익 구조는 사실 무협 소설과 그닥 괜찮은 궁합이 아닙니다.

편당 결제란 모름지기, 다음 편을 읽게끔 흥미가 돋을 수 있도록 한 편 안에서 그 날 연재분의 맥락이 어느 정도 완결나야 하고, 문체는 간결해야 하며, 갈등 관계는 빠르게 해소되어야 합니다.

대개가 영웅담의 형식을 띠는 정통 무협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나 할까요.

귀환해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레이드 시대에 강한 힘을 갖고 무쌍난무한다는 설정이, 어릴 적 사부를 잃고 심산유곡에서 수련하다가 복수하러 강호출도한다는 설정보다 좀더 웹소설에 쉽습니다.

이런 무협 소설의 특징을 타파하기 위해 꽤 많은 시도가 있었는데요. 적당껏 살던 주인공한테 뜬금없이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를 실행시켜 강호만렙지존까지의 여정을 그려내거나, 혹은 강호를 멸망시킬 주인공을 찾아 떠나는 설 씨 미녀로 하여금 달달풍인지 무협풍인지 헷갈리는 천하제일 모험담을 펼치게도 합니다.

물론 다 재밌고 히트한 시도지만, 가끔은 대여점 그때의 감성을 느끼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죠.

다행히 우리는 대여점 시절의 감성을 찾을 수 있는 연재란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웹소설 조아라의 노블레스란, 편당 결제보다 살짝 긴 호흡과 빠른 연재 주기가 특징이죠.

그 중에서도 꿋꿋이 무협 장르를 견지하며 생존하고 있는 소설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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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력 쓰는 마인> #4점만점에2점 #약삭빠른주인공

독수리3호 작가의 무협 소설입니다.

독수리3호 작가는 노블레스에서 데뷔한 작가입니다. 글의 색깔을 보면 문체는 평이하고 캐릭터를 잘 표현한다기보다는 주인공 친화적입니다. 주인공으로는 대체로 엄청 착하거나 나쁘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교활한 범인이 등장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무협 소설에 가장 어울리는 특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녹정기>의 위소보가 사랑받은 이유가 그가 엄청난 카리스마를 자랑해서는 아니거든요. 쥐뿔도 없는데 강호에 떨어져서 우연찮게 고난을 헤치고 살아남으려고 눈치를 살피는 건 흔하지는 않지만 항상 재밌는 포맷입니다. 정구 작가의 작품도 그런 편이고, 독수리3호 작가의 초창기 작 중 하나인 <동창>을 보면 본인의 특징을 가장 잘 내세운 무협 소설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염력 쓰는 마인 역시 그렇죠.

정마대전의 한 마졸로 참전한 주인공은 우연찮게 기연을 얻게 됩니다. 바로 여타 소설의 흡성대법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북명신공인데요. 이후로 마교의 수련지로 끌려간 주인공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과 경쟁하게 됩니다.

수련지에서 경쟁하는 건 여러 무협지에서 많이 등장하는 클리셰죠. <악마전기>의 주인공 역시 마교의 수련지로 가서 살아남기 위해 끌려가고, <비인살수>의 주인공은 살수가 되기 위한 수련에서 살아남습니다. <염력 쓰는 마인>의 초반부 역시 그런 점에서 별다를 것 없습니다만, 재밌는 건 주인공이 살아나가는 과정입니다. 악마 같이 강렬한 카리스마나 특출난 대기만성의 그릇 같은 것 없이 주인공은 오직 약삭빠를 뿐입니다. 염력이나 흡기공은 강력한 힘이지만 결국 그것뿐이고, 벌레처럼 언제든지 짓눌려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근처의 모든 것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입지전적인 무위로 올라서게 되죠.

무공이 전부가 아닌 세상에서 주인공은 강력한 무위를 획득하게 되었음에도 교내의 파벌 간 정치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시 한 번 아등바등해야 합니다. 특출난 것 없어 보이는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 마교라는 대세력의 거두가 되는가 흥미가 돋는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쪼렙천마> #4점만점에2점 #짐꾼부터시작하는이세계천마

캘리버 작가의 소설입니다. 일전에 서평했던 <기적의 분식집> 작가이기도 합니다. 작풍 역시 그때 소개했던 것과 다르지 않아서, 평이한 문체에 캐릭터를 잘 표현한다기보다 주인공 친화적인 필력이 있겠습니다. 독수리3호 작가와 다른 건 주인공의 성격이 있겠네요. 어쨌든 카리스마형 주인공은 아닙니다. 사실 카리스마형 주인공이란 대개 오글거림의 다른 말이기도 하고요.

시작은 폐관수련에 들어간 천마가 귀환하면서부터입니다. 폐관 수련 후 귀환한 주인공 역시 자주 쓰이는 클리셰고 언뜻 보면 성상현 작가의 <천년무제>와도, 혹은 古 둔저 작가님의 <불패신마>와도 비슷한 시작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쪼렙천마>에는 그들과 다른 한 가지 차별점이 있습니다. 천년무제나 불패신마가 주인공이 힘을 그대로 간직하고 귀환해서 난장판을 피운다면, <쪼렙천마>에서는 주인공이 말 그대로 쪼렙으로 화합니다. 쪼렙? 무림세계에서는 안 어울리는 말이지만, 그렇게밖에 형언할 수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괴물을 레이드해야만 하는 세계로 변화한 무림, 기득권층인 한국인들이 천마를 보고 말하거든요. 어? 쪼렙 아냐?

예상했듯이 우리의 주인공은 결국 본래의 강한 힘을 돌려받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쪼렙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닙니다. 세계관은 점점 확장되고 주인공은 계속해서 열렙해야 합니다. 열렙의 목표는 단 하나, 이 모든 변화를 종결짓고 본래의 무림을 되돌려받겠다! 열렙하는 천마의 여정과 그 과정에 얽히어드는 적수와 히로인들은 다소 빤하지만 예정된 즐거움을 줍니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인데, 작품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걸 스스로의 단점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엉망진창으로 날려보내서 마구마구 세계관을 확장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ALLA 작가의 <로만의 검공>은 드래곤볼 수준으로 전투력 인플레가 일어나면서 별의별 거대한 설정이 계속 덧붙여지지만, 아직까지 그의 역작으로 남고 있죠. 반면 <환생좌>는, 초반은 무척 재밌지만 무지개색 지대라는 설정이 후반부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명성에 맞지 않게 중후반부는 그냥 그 정도로만 재밌습니다. 빨간색부터 시작해서 보라색까지 전진하는 여정이야 결국 보라색 지대에서 완결나리라는 걸 모두가 예상할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쪼렙천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부분도 한국으로 쳐들어간 둘이 빌딩을 무너뜨려가면서 싸우는 장면이거든요.

개연성이나 필력은 결국 재미를 부여하는 정도면 충분하고, 장르소설은 재밌기 위해 읽는 겁니다. ALLA 작가의 문장력은 빈말로도 유려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로만의 검공>은 재밌습니다. 작가의 염려는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시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는 작품의 어떤 점이 독자에게 재밌을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리저리 꿈틀거리는 작품을 어떻게든 말이 되게 만들었을 때 그게 독자에게 재미없을지 혹은 더 재미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완성된 글만 접하는 독자에게 ‘원래 그 작품이 그랬어야 할 모습’이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항상 예상할 수 없는 재미를 주는 작품이 널려 있을 수는 없고, <쪼렙천마>는 그런 점에서 장르소설을 잡고 읽었을 때 충분히 우리가 생각하는 재미를 독자에게 부연합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섹스 묘사 역시 이미 완결된 작품인 데다 독자에게 스킵할지 안할지의 선택지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산점이 되는 볼거리입니다. 열렙하는 천마의 분투를 보고 싶으시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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