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민수 - 케미 장르소설 추천사

#조아라 #웹소설 #현대 #화학 #4점만점에 3점 #김민수 #케미 #화학자다비켜주인공나가신다


어릴 적 퇴마록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는 그게 실제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좀비가 있다, 없다의 문제로 어머니랑 싸우다가 사실 소설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네요.


그 와중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이우혁 작가의 말도 여전히 기억에 있습니다. ‘내 소설의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딱 특정지어 말하기 참 모호한 장르다…’


오우거를 때려잡는 판타지 세상이 득세하던 시대에 현대를 배경으로 한 퇴마사 일행의 여정은 그토록 센세이셔널했습니다.


지금은?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는 넘치고 넘치고도 모자라서, 현대 판타지라는 새로운 수요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도심을 배경으로 한 속에서 우리는 이제 갑자기 포탈을 통해 나온 몬스터를 때려 잡거나, 이계에서 귀환한 절대자가 되어 암흑가를 일통하거나, 혹은 그런 이능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요리나 연예계의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기도 합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기 마련이고, 사람은 익숙한 재미보다는 낯익은 재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현대 판타지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비슷한 재료로 누가 더 뛰어난 맛을 만들어내는가 정형화된 포맷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리물, 연예계물, 레이드물, 재벌물, 기타 등등… … . 여기서 벗어나는 작품은 그만큼 재미있어서 독자를 끌어들이던가, 혹은 실패하던가 둘 중 하나겠지요. 뛰어넘거나, 떨어지거나.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려면, ‘전혀 몰랐던 재미 - 화학적 재미 - 를 개척한’이라는 수식어가 빠질 수 없겠습니다.


화학 판타지, 민수 작가의 ‘케미’입니다.


첫 편은 주인공의 임상 실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느 나라보다 임상 실험 지원자가 많은 것으로 유명한 한국의 청년답게 주인공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임상 실험에 지원하는데요. 모두가 잠든 와중에 혼자 어두운 병실 안에서 깨어난 주인공, 이후 그는 임상 실험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담당 의사를 만나고 KG화학의 입사계약서를 쓰면서 그것이 단순한 임상 실험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화학자의 길을 걸어나가게 되죠.


처음에는 단순히 취업에 성공했던 것에 좋아했던 주인공은, 이후 화학자로서의 행보를 걸어나가면서 점차 세계에서 인정 받는 명사로서 자신만의 발걸음을 화학사에 새겨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닥쳐 오는 일상의 사건들에 일류 화학자 명사로서 개입하거나, 혹은 연애 밀당을 하거나, 혹은 임상 실험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좌충우돌하거나 하기도 하죠.


화학의 히읗 자도 모른다고 해서 작품이 재미없을까 하는 염려는 필요 없습니다.


작가는 독자가 어떤 데서 재미를 느끼는지 잘 꿰뚫고 있고, 일류 화학자들 앞에서 그들조차 놀라워하는 성과를 내놓는 주인공의 모습과 그런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갖가지 사건들은 어떻게든 그걸 해치우고 나가는 주인공의 지능으로부터 독자에게 ‘화학적 쾌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점차 상승하는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는 일개 청년 백수로서의 처음부터 지켜와봤던 독자에게 어떤 감명까지 느끼게 만들죠. 주인공이 외는 화학식은 알면 좋을 수도 있을 테지만, 없어도 전혀 상관없는 미세한 조미료 정도랄까요? 그 조미료가 화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MSG와 약간 닮기도 한 것 같습니다.


챕터를 보면 에피소드를 뚜렷하게 구분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머릿속에서는 한 챕터를 시작할 때 그 챕터가 어떻게 진행될지 이미 기승전결이 뚜렷이 계획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성 작가답다고 하고 싶네요. 챕터마다 현대를 배경으로 주인공에게 어떻게 다양한 위기를 안겨줄지, 어떻게 화학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지 작가의 고심이 엿보입니다.


기성 작가라고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민수 작가는 본래 무협으로 유명했던 작가입니다. 아마 이 리뷰를 읽는 몇몇은 분명 책방에서 본 기억이 있을 ‘외공&내공’에서부터 시작해서, ‘찰나의 유혼’으로 이어가던 성공작의 경력은 한참동안 끊겨 있다가 ‘잔혹협객사’로 문피아에 복귀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2부 ‘비정자객사’를 연재하던 민수 작가는 ‘케미’의 전작인 ‘포텐’으로 현대 판타지에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이르는데요.


독자가 이입하기에 좋은 주인공을 쓰는 데 재주가 있었고, 단순히 복수에 미친 살인귀라거나 절대자가 아닌 말 그대로 독자친화적인 주인공이 헤쳐 나가는 무림의 사건들은 민수 작가를 눈여겨 볼 만한 작가로 기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잔혹협객사에 이르면 작가가 말한 것처럼 미드 덱스터를 무협지로 읽는 느낌이랄까요.


자객을 주인공으로 했던 비정자객사는 사실 제게는 그닥 좋은 평을 주기 힘들었지만, 이후 포텐으로 돌아와 아직 죽지 않은 필력을 과시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케미’로 현대 판타지의 새로운 장을 썼다고 하고 싶네요. 어떤 외적인 전기적 요소도 넣지 않았다는 점에서, 케미는 사실 ‘판타지’가 아니죠. 순문학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장르소설 특유의 쾌도난마하는 성격을 갖지만, 책으로 내놓아도 상관없지 않나 싶습니다.


문제는 사실, 작가의 필명으로부터 기억할 점은 이런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민수 작가는 고질적인 연중병으로 유명합니다. ‘찰나의 유혼’의 주인공은 아직도 찰나일 것만 같던 연중에 머물러 잊혀 있고, 포텐 역시 잦은 연중을 겪다가 완결 직전에 긴 휴재에 들어가게 됩니다. ‘켠김에 지옥까지’의 작가는 완결 챕터 직전 있던 긴 휴재에서 돌아오면서 ‘완결을 더욱 완벽하게 쓰고자 싶은 마음’이 연중의 원인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요. 포텐이나 케미나 종장에 가까운 지점에서 있던 연중이라는 점에서 아마 비슷한 동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연중작이라면 추천을 하지 않았겠죠?


다행히도 케미는 돌아왔고, 주인공은 특유의 화학적 성찰로 잠시나마 끊겼던 행보를 이어갑니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갖가지 약물을 연금술사처럼 연성해내지만, 안타깝게도 다시는 연중하지 않도록 하는 약물은 현실에 없겠지요.


그런 약물이 나오길 바라면서,


‘화학적 재미’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신 분께 민수 작가의 ‘케미’를 권합니다.




워마드로 돌아보는 가상 사회 - <이정우, 여러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읽고 독서

 시뮬레이션이 벌어지는 장소인 가상 세계는 현대에 와서 새롭게 대두된 개념이다. 이 심상의 세계는 디지털에 근거한다. 스마트폰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인은 일상의 한편으로 언제나 이 가상세계를 영위하게 되었다. 가상 세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겪어진다. 하나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인류 역사와 줄곧 동반해온 꿈의 세계는, 디지털의 발달과 더불어 문학에서 영화, 영화에서 더 나아가 가상 게임으로 진화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현실 세계에 부속하는 가상의 사회이다. 이 가상 사회는 현실의 권력과 밀접한 경향을 띤다.


 가상사회를 누리는 대중화된 방식은 SNS이다. 이미지의 세계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시뮬레이션에 연관되어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를 갖는다면, 가상 사회에서는 주체가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이다. 그들은 익명성을 통한 아바타를 갖고, 담론을 통해 공통의 추상적 시뮬레이션을 정립하여 현실의 권력과 연결짓는다. 언뜻 이러한 목적의식적 활동을 굳이구분지어 가상 사회로 부를 필요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상 사회는 그 기반을 가상 세계에 두어거의 모든 의견 교환이 가상 세계에서 이루어지며, 가상 세계의 특성상 열린 접근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갖는다. 가장 쉬운 가상 사회의 예시는 남성 혐오 웹사이트인 워마드이다.


 워마드가 가상 사회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상 사회는 가상 세계에서 다른 군집과 해당 사회를 구분짓는 가상세계상의 국적이 있어야 한다. 최순실 사건 때 온 국민이 가상 세계에서까지 들고 일어났지만 가상 사회로 구분짓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온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담론이었을 뿐이지 어떤 조직적 활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워마드는 페미니즘을 표방하지만, 그 방식은 제 3 세계의 여아들이 쓰기에 적절한 생리대를 후원하거나 위안부 관련 활동 등의 부외자가 공유할 수 있는 이념이아니다. 느개비나 한남충, 유충 살해나 소추 및 루저페이로 대변되는 한국 남성 혐오의 문화적 특질을 갖고, 그 문화를 영위하기에 적절한 구성원이 제한되므로 워마드는 가상 사회라 할 수 있다.


 가상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이 현실에까지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종착역을 가상현실로 삼는 꿈의 세계 역시 현실의 자본에 기반하지만, 그 세계 자체는 현실과 동떨어진 완벽한 비현실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가상 사회는 도리어 가상 사회에서 정립된 공통의 시뮬레이션을 공유하고,그에 따른 본인들의 기치를 현실에서 구축하려 노력한다. 가상 세계의 권력이 현실로 역행하는것이다. 이 시뮬레이션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가상 현실을 닮기도 한다.


 가상세계와 현실 세계를 오가는 주체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때, 그것을 일종의분열증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금에 이르러서, 가상 세계에 잠식되는 것과 가상 세계의 자신을 구분할 필요성이 떨어지고,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가상 사회의 자신으로서 현실에서 활동한다면 더 이상 분열증이라 할 수 없다. 일부가 앓는 비정상은 병증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모두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이 아니라 현상이 되기 때문이다. ‘가상 사회라는 단어를 대두시키고, 그에 따른 폐단에 유의해야 할 때가 왔다.


 가상사회는 현실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법과 도덕을 위배하기 쉽다. 2004년의 미네르바 사태나 최근의 드루킹 사태에서 드러난 일련의 조직적 가상 세계 행위 역시 가상 사회로 이해할 수 있으나, 결국 모두 검찰 수사를 받는 결말을 맞았다. 웹사이트 일간베스트 저장소나 워마드 역시 세월호 사태를 조롱하거나 남자 화장실 몰카 영상을 공유하는 등의 도덕적 해이 현상을 보인다. 현실 세계의 인과를 분석하고 개선하려는 노력보다 본인들의 논리로 정립한 시뮬레이션을 우선한다면, 현실 세계의 가치는 부가적인 것으로 떨어지기쉽다. 초창기 가상 세계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간의 혼동을 우려했다. 이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가상 사회가 미치는 현실에의 영향에 경각심을 느끼고가상 사회가 창출해낼 수 있는 건전한 담론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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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감상문 레포트


여기서 에이쁠 맞아야 총 에이 나올 텐데

애매

교수가 페미니즘 좋아하는 것 같던데...

내 능력으로 저 논문 읽고 그거밖에 안 떠오르는 걸 어떻게 하냐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어벤져스 3 : 인피니티 워> 영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에는, 세계의 농업생산력은 120억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데 60억 인구 중 30억은 여전히 굶주린다는 내용이 해설되었다. 한참동안 잊고 있던 그 책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교양 수업에서 게임 이론에 대한 설명을 듣던 도중이었다. 모두에게 최선이 될 수 있는 선택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그 이론을 들으면서 나는 인류 절반이 겪는 불합리한 굶주림의 본질에 대해 뭔가 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라면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이하 어벤져스3)에는 그러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타노스다. 작중 우주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지성체의 인구는 점점 늘어간다. 여러 행성이 멸망하는 가운데 타노스는 인구를 줄이면 된다는 해답을 내세우고, 전능함을 부여하는 인피니티 스톤을 찾아 우주를 구원하려 한다. 지구의 영웅들은 그런 타노스를 미치광이로 규정하고 인피니티 스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결국 갈등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전체는 부분에 우선하는가?


타노스와 영웅들이 싸우는 이유는 이에 대해 서로 다른 사유가 부딪치기 때문이다. 우주가 겪는 인구 문제에 있어, 타노스는 구성원 개인이 가족 등을 잃는 불행을 겪더라도 전체의 안위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위해 타노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즉 타노스에게 있어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될 수 있는 개념이다. 반면, 지구의 영웅들은 개인을 우선한다. 영웅들은 타노스가 내세운 방법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집단의 구성원이 집단을 위해 희생되는 것은 영웅들에게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언뜻 이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 이미 우리는 해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중순, 세계대전이라는 과오를 통해 전체주의는 옳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벤져스3에서 타노스가 내세우는 ‘전체’는 국가가 아니다. 말 그대로 우주의 ‘모두’를 말하는 것이고, 타노스는 따라서 공익의 기치를 내세우는 인물이 된다. 우주의 파멸을 막기 위해 다소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일단 옳은 선택을 하자는 것이다. 그에 반하면 영웅들은 다분히 개인주의적이다. 미래의 우주가 어떻게 되든 일단 본인들의 터전인 지구를 지키려 한다. 그렇다고 대안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며, 당장 눈앞의 희생을 볼 수 없을 뿐이다. 말 그대로 ‘개인’을 위한 선택, 따라서 타노스가 던진 난제는 해답이 없는 가치판단의 문제로 비화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예전부터 오랫동안 철학에서 다루어왔던 딜레마 중 하나다. 살면서 이와 비슷한 많은 가치판단의 사례를 겪기도 한다. 타노스의 난제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국가, 인류를 넘어선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세상을 지키기 위해 희생이 필요한데, 그게 나라면? 영화는 궁극적으로 다음의 선택지를 감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피니티 스톤을 손에 넣은 타노스가 인구의 절반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죽는다. 즉 나만 살고 모두가 죽던가, 모두를 살리기 위해 내가 악역으로 전락하던가.


최선의 합의가 희생을 전제로 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가장 적은 비용을 감당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할 것인지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이미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희생을 겪고, 때로는 남에게 그 희생을 같이 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해 자가용을 되도록 이용하지 않는 것은 이미 합의된 희생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타노스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은 타노스가 인구의 절반을 무작위로 소거하면서 본인까지 그 범주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본인의 생존에 대해 놀랐다는 것이다. 최소한 본인만큼은 희생 당하는 것에 동의한 셈이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크고 작은 대의에서 우리가 가장 옳은 타결을 위해 어떤 희생을 필요로 하는지, 그 희생이 타노스가 만들어낸 것처럼 합의되지 않은 강요라 해도 여전히 고개를 끄덕일 것인지 한 번쯤은 우주적으로 생각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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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대신 내는 과제였는데
제발 B 밑만 나오지 않기를

good 멸망한 세계의 사냥꾼 장르소설 추천사

멸망 이후의 세계란 어떤 모습일지 이따금씩 상상해보고는 합니다.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한 한 폭력적인 가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문명이 멸망한 세상에서 피식자의 위치로 전락한 인간의 생존 방식은 대충 생각하기에도 그닥 영광스러울 것 같진 않죠.


사람들 안에는 어쩌면 선사시대 적 야만에의 열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도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런 가정에 대한 비참한 답을 내놨고, 그 안에서 인간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 마지막 인간으로 남아 뱀파이어들을 죽이고 외로이 횡행하거나 혹은 멸망 이전 거주 공간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지하철역에 모여 들어 국가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임모탄을 섬기고 엔진을 숭배하는 황야의 폭주족도 있고요.


이제 그들 못지 않게 흥미로운 답안지를 제시한 작품을 하나 얘기하려 합니다. 바로 멸망한 세상의 사냥꾼(이하 멸세사)입니다.


오래 전부터 세계는 멸망해 있었고, 괴물들은 황무지 위를 거닙니다. 괴물들을 죽이면 나오는 칩은 화폐, 금본위제도에서 무력본위제도로 회귀한 세상은 이제 새로운 생산자의 역할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은 그들을 사냥꾼이라고 부르죠.


사냥꾼들은 의뢰를 받고 그것을 해결해주는 대가로 칩을 받는 직업적 도살자입니다. 칩을 신앙으로 하는 사냥꾼은 그 위에 어떤 우선순위도 올려놓길 꺼려합니다. 그들은 이 멸망한 세계에서 너무 많은 가치역전의 사례들을 보아온 탓에 결국 칩만이 믿을 수 있는 단 하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진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진은 능숙한 사냥꾼입니다. 멸망한 세계가 만들어낸 갖가지 사회 군상을 감흥없이 지나치며 진은 계속해서 의뢰를 완수할 뿐입니다. 하지만 진이 단순히 그냥 능숙한 사냥꾼인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어마어마하게 능숙한 사냥꾼입니다. 심지어 악마까지 사냥할 정도로요.


도시괴담으로 전해지는 사냥꾼의 하나, 악마 사냥꾼인 진은 어느 날 평소처럼 의뢰를 이행하다가  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동행은, 소중한 것을 만들기에 이미 너무 많은 후회로 닳은 줄 알았던 악마 사냥꾼에게 조금씩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해갑니다. 그러던 와중 진은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악마와의 인연에 발을 들이밀게 됩니다.


[이제 나를 위해 살겠다]로 시작해서 [사상 최강의 매니저]로 만개했던 글쟁이S는 이 작품에서 이제까지와는 색다른 재미를 엿보여줍니다. 고독한 사나이와 소녀의 동행은 제법 높은 인기를 구가해온 클리셰고, 색다르게 장르소설적으로 해석한 멸망 이후의 세계관은 작가가 그리는 일행의 여정에 완성도를 더해줍니다.


좀비나 바이러스를 넣지 않고 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려낸 작품은 드물고, 그 중 생존성이나 주인공에 대한 편의성 없이 그 자체로 작품을 매력적으로 가꾼 글은 더더욱 드뭅니다. 하물며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들임에야, 작가는 어떤 글을 독자가 읽어볼 만하다고 여기는지 잘 숙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이 괴물들에 어떤 식으로 맞서는지, 그리고 방랑하던 악마 사냥꾼이 한 소녀로 인해 어떤 식으로 변화해가는지 흥미가 돋는다면 읽어보실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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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스포 및 사족)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사실 재밌는 작품일수록, 조금의 흠결도 더 재밌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깊게 남는 경우가 많죠. 멸세사도 그렇습니다.


멸세사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작가가 보여주는 작풍의 변화입니다. 예컨대 [나를 위해 살겠다]는 흔한 회귀물로 시작해서, 회귀 전 악연에 대한 주인공의 복수 장면에서 제법 흔치 않은 회귀물로 변화합니다. 회귀 이후 주인공의 캐릭터성을 형성하는 것 자체가 그 복수심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완수한 주인공의 캐릭터에는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변화를 작가는 괜찮은 방식으로 해설해냅니다. 전체 비중을 따지면 사건 묘사가 9에 감정 묘사가 1이라고나 할까요.


[사상 최강의 매니저](이하 사최매)는 [나를 위해 살겠다]에서 작가가 다른 회귀물과 차별화되었던 점을 더욱 앞으로 내세운 작품입니다. 흔한 레이드물 같지만 세계관이 완성도 있고, 주인공이 가진 비밀이 조금씩 풀려 나오면서 결국 파탄으로 치달아가는 전개는 무척 씹을 맛이 납니다. 글쟁이S가 다른 작가와는 다르구나 하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건 묘사 8에 감정 묘사 2쯤? 재밌는 건 사최매 작중 흐름에 따라 문장의 묘사도 변한다는 점입니다.


엄청 간결한 편까진 아니지만 딱 적절한 정도의 가독성을 갖고 있는 문장들은 캐릭터의 감정이 격해지면서 색다른 지분을 갖고 문단으로 부연되는데, 작가가 개입해서 철학적 서술을 하고 그에 따라 캐릭터의 여운을 남기는 방식입니다. 설명체죠. 감정선이 깊어질수록 설명체의 비중은 높아집니다.


그리고 멸세사에서 이 작풍의 변화는 고점에 도달하고야 맙니다. 멸세사는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2부만 따져 보면 사건 묘사 6에 감정 묘사 4 정도가 되겠네요.

개인적으로는 멸세사의 1부를 생각할 때 2부가 좀더 괜찮은 방식으로 쓰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개에서도 그렇고 서술 방식에 대해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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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가 악마사냥꾼으로서의 진과 일행의 여정이라면, 2부는 악마사냥꾼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진과 일행의 여정입니다. 즉 1부에서 소중한 인연을 만들고 그들 일행의 여행을 그렸다면 2부는 이제 그 일행들 간의 재회 및 대적에의 타도를 그리는 일대기입니다. 그런데 2부는 소중해진 인연들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서, 1부와는 소설적인 성격이 사뭇 다릅니다.


2부는 뿔뿔히 흩어진 일행의 재회와 내전, 그리고 칼츠에 대한 대적으로 진행됩니다. 후기에 보면 작가가 개인적으로 힘들어서 집필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는데 아마 전쟁 장면과 그 후의 어딘가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전쟁은 산만하다 못해 정말 너무 긴 감이 있습니다. 사최매에서 보여줬던 밀도 높게 처절한 전투 장면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일행은 뒷전으로 작중 전쟁은 그저 수행될 뿐입니다. 샤를과 소서란의 대치 구도가 그나마 캐릭터의 대치 구도라 할 만한데 이마저도 그닥 공감가진 않습니다.


이러한 전개 와중 문장은 점점 짧아지고 엔터를 자주 띄우며, 주어를 작가로 하는 작가 개입 문장이 극도로 많아지면서 독자의 감정을 고조하려고만 합니다. 소서란의 절망 장면에서 그런 감정적 서술은 무척 슬프게 그려지지만, 그 후로도 계속해서 나오는 감정적 서술은 1부와는 다른 소설인 것 같습니다.


전쟁 이후 이제 주인공 일행은 칼츠를 맞이하러 가는데, 1부에서 현실적인 악당이었던 진은 2부에서 인간찬가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실 칼츠가 아닌 진이 모든 것의 근원이고 칼츠의 의도가 올바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려 한다는 건 식상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만, 결국 싸우기로 결심하면서 칼츠를 이겨내는 주인공 일행의 묘사는 흡사 절대악에 맞서는 의지의 표상 같습니다.


문장 묘사는 감정적 서술의 절정을 맞이하고 전개는 그에 부합하게 열기를 띠어가는데, 작가의 작중 해명에 납득해주냐 마냐의 문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싸움에서 끝내 캐릭터의 일관성까지 고조되는 감정선에 묻히고야 말았다고 느꼈습니다. 죽도록 사랑한다던 프레이는 람필을 애걸하기보다 포기해버리고 극악무도한 우두머리였던 소서란은 차마 팔다리 자른 샤를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칼츠에 대한 살의를 불태웁니다.


특히 바로 얼마 전까지 동생의 죽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천제에게 구걸했던 소서란이 칼츠가 동생을 살려주겠노라 하자 거짓말임이 분명하다며 그게 가능하더라도 기만하지 않기 위해 안 살린다는 둥의 소리를 하는데, 얼마 전 느꼈던 비애가 무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레오네와 칼츠는 누가 더 철학적으로 옳은지 싸우면서 떠들죠.


멸망한 세계는 모두에게 가혹한 생존 방식을 강요하고, 주인공 일행은 강요 당하는 걸 넘어서서 그 약육강식을 행동 양식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옳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죄없는 군인들을 마구 학살하면서 시체로 되살려내는 소서란에 동조해서 재앙을 확대시키죠. 꼭 그것만이 아니라도 일행 스스로도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일행에 대한 서술은 레오나에 대한 진, 일행의 서로에 서로에 대한 애정을 부각하면서 어떻게든 서로를 위해 싸워나가는 일행을 말 그대로 ‘주인공’스럽게 그려내기 때문에, 반대로 말해서 그런 그들의 감정선은 전개에만 합치될 뿐 이전까지 보여줬던 캐릭터로서의 일관성이 다소 매몰된 느낌이 듭니다. 거기다가 사최매와 달리 일행에게 주어지는 비극은 소서란의 것을 마지막으로 극복 불가능한 비극이라기보다는 어떻게든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이겨낼 수 있는 역경일 뿐입니다. 란필이 차라리 소서란만한 감동과 함께 죽었다면!


인간찬가라고 한 이유를 이젠 아시겠죠. 그것도 한계를 갖을 수밖에 없는, 매우 모순적인 인간찬가입니다. 어차피 개새끼들과 개새끼들이 맞붙는 셈인데, 구태의연한 해피엔드보다는 처절하고 비극적인 언더독 싸움이 더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사최매처럼요.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을 그려내는 문장 서술은 사최매에서보다 더욱 감정적인 경향이 강화되어, 캐릭터의 이야기보다는 감동을 쥐어짜내는 작가의 말소리를 직접 귀에 꽂아 듣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애써 많은 걸 얘기하려 하지 않고 절제된 묘사만으로도 이미 독자는 슬픔이나 감동에 취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요.


결말은 비극이라면 비극인데, 2부를 다 읽어가던 끝에 저는 4억년이라는 예정된 시간에 좀 안심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이렇게 긴 세월만은 어떻게 꿉꿉한 식으로 극복되지 않겠지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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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정도로 긴 사족은 반대로 그만큼 아쉬움이 컸다는 거고, 아쉬움이 컸다는 건 그만큼이나 재밌는 소설이었다는 걸 반증합니다. 그저 그렇게 봤다면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흠결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감상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개인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제 감상 역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입장을 담았을 뿐이지 실제로 서술 방식의 전환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글을 쓰면서 우리는 작가의 개입이 없어야 한다고 배우지만, 장르소설은 선생님이 채점하는 글짓기 과목이 아니라 시장 성적으로 채점되는 글이니까요. 결국 독자 한 명의 감상에 불과한 사족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서술체로 좋은 인기를 거둔 소설을 많이 알고 있죠. 그런 면에서 작가가 거쳐온 변화는 이런 데서 좋다 나쁘다 하기보다 차기작의 성적으로써 성공적인지 아닌지 가늠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장르소설은 작가가 만들어낸 하나밖에 없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가 다른 데서 볼 수 없이 독특하고, 캐릭터는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심지어 길기까지 하다면 오랫동안 그 안의 인물들과 같이 활보한 만큼 깨어나는데 후유증이 생길 겁니다. 멸망한 세계의 사냥꾼은 그런 후유증을 주기에 충분한 소설입니다.


주인공이 사족과 다름없는 짐덩이를 거느리는 것으로 소설이 시작되더니 추천사에도 제법 긴 사족이 달렸습니다. 후유증을 겪은 지 너무 오래 된 분, 재밌는 소설을 읽었다 하는 만복감에 젖고 싶은 분은 멸망한 세계의 사냥꾼 추천드립니다.


혼자 지내면서 일상

 혼자 살면 바빠야 한다. 

 바쁘다는 건 인간 관계로도 좋지만 인간 관계로 바쁘지 못할 사람은 자기만의 일로라도 바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롭더라.

 얼마 전엔 혼자 지냈었다. 나는 자취를 하는 중인데, 대학생인고로 내 나름의 자기계발과 학교 공부를 겹쳐 일과표를 바쁘게 짠다. 그러다가 중간고사를 보고 얼마 간 놓고 지내는데 자취방 침대에 혼자 누워 웹소설을 스크롤해대는 일상이 어찌나 권태롭고 우울한지! 문득 떠올리건대 이상의 수필 중 제일인 건 역시 권태가 아닌가 싶었다. 그만큼 공감갔고 그만큼 외로웠다.

 헤어진 지는 어언 1년이 다 되간다. 1년으로 치는 이유는 그 중에 사귀었던 것으로 치지 않아야 옳겠다 싶은 관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아 내가 그동안 혼자서 시간이 많이 남을 때도 외롭지 않았던 것은 가족의 덕분이었구나, 내가 더 나아가기 위해 어떤 방개질도 하지 않아도 절대적인 친인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존재란 얼마나 소중한지, 그런 것 따위를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친구를 사귀면 외롭지 않으리라도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마음가짐은 가족들이나 혹은 건전한 일상이 복귀하고 나면 사라지고 만다.

 아무튼 그렇다.

 본인이 친구도 없고 혼자 사는 인간이라면, 혼자서도 바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안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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